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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 Oct 17. 2021

내겐 너무 버거운 그대, 컴플레인

# 소심하고 충실한 F로 살고 있습니다만,

(1)

컴플레인. 듣기만 해도 괴로워지는 단어이다. 보통은 컴플레인을 너무 많이 받는 걸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 반대가 더 부담스럽다. 컴플레인을 해야 하면 마음 한 편이 퍽 불편해진다.

그렇다. 왜인지 나는 컴플레인을 너무 못 할 때가 많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컴플레인은 소위 말하는 싫은 소리들을 포함한다. 아! 당연히 비난이 아니라 건설적인 비판이다. 컴플레인이 어감이 좀 부정적이어서 그렇지, 사실 정당한 절차와 방법을 거친다면 꽤나 건설적이다. (왜 초등학생 때 배우지 않았는가. 비난과 비판은 다르다고.) 

사실 사회생활이 이 컴플레인의 연속일 때가 많다. 몇몇 못난이들이 짜증내고 우는 소리를 하면서 비난을 하고 그것을 컴플레인이라 떠들어서 그렇지 건설적인 비판은 어디에나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컴플레인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내 컴플레인이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대방도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고 그 반응으로 인해 내 마음도 함께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큰 문제는 내가 꽤나 논리적이고 예리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누이 이야기해왔지만 우리는 남들보다 많은 감정을 느끼고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보다 예리해진다. 그런 데다가 나는 매 학기 최소 4회 이상 반복되었던 팀 프로젝트나, 소논문 등으로 인해 논리의 허점을 아주 집요하게 파고드는 훈련까지 해왔다. 예리함에 예리함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속에서 하고 싶은 말, 할 수 있는 말은 많은데 전하질 못하니 속이 터지는 경우가 아주 많은 것이다.


비판 대상이 옛날에 살았던 학자의 의견,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기업의 마케팅 담당자의 전략, 정치인의 정책, 어떤 한 의견을 지지하는 불특정 다수 등이라면 얼마든지 논리적이고 멋있게 풀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그리고 내 전화기 너머에, 내 컴퓨터 저 편에 앉아 있을 사람이 컴플레인의 대상이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남들보다 예민하게 잡아낸 오류나 허점 등을 막 풀어낼 수가 없어진다. 나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사람들이니까. 내가 불편해 지니까. 


컴플레인을 받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불같이 화를 내거나 혹은 잘못했다고 사과한다. 불같이 화를 내면 나도 화가 나고 억울해지고, 잘못했다 말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너무 심했나 측은해진다.

어찌 되었든 내 마음이 퍽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2)

그런데 컴플레인을 잘 못하면 그 사람 자체가 싫어진다. 설사 내가 컴플레인을 하고 싶은 그 대상이 나름의 깊은 뜻으로 악의 없이 그렇게 했더라도 말이다. 내가 먼저 불편한 점을 지적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자신의 행동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상대방의 피드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상처도 받고 그 사람 자체가 싫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떨 때는 그래도 되는 호구가 되기도 한다. 컴플레인으로 서로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 망설이는 이런 나의 착한(?) 마음을 악용하는 못난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생활 경험이 쌓이니까 그런 못난이들을 구별해 낼 수 있는데, 못난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기 일쑤이다.) 그렇다면 컴플레인을 또 잘해서 너무 자주 하면? 왕따가 되겠지. 좋은 소리도 계속 들으면 짜증나는데 어찌 되었든 나와 다른 생각, 나의 잘못을 돌아봐야 하는 그런 컴플레인이 듣기 좋을 턱이 있나?


어찌 되었든 내게 컴플레인은 이렇게 힘든 일이다.



(3)

컴플레인 제대로 하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고 했던가? 컴플레인을 아주 제대로 하는 혹은 어떨 때는 아주 세게 날려주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반대로 그런 컴플레인을 받았을 때 적절히 대처하여 호구가 안 되는 방법도 찾아내었다. 비난은 줘 차 버리고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랄까? 비판도 비난도 구분 못하는 멍청이가 되기보다 우아하고 예의 바르게 해야 할 말만 하는 방법을 배웠다 할까?


주의 사항. F들의 컴플레인 방법에 대해 논하기 전에, 먼저 알아둬야 할 점. 컴플레인은 제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너도 안 다친다. 가끔 위계질서, 힘의 논리 등으로 되지도 않는 윽박을 지르는 못난이들이 있는데, 우리 부디 그렇게 되지는 말자. 없어 보인다. (그리고 누군가 당신에게 그렇게 한다면, 많은 생각을 하거나 많은 감정을 느끼거나 하지 말자. 시간이 아깝다. 그냥 못난이가 못난 짓 하나보다 하고 나쁜 감정들로부터 나를 지키자.) 컴플레인은 비난도 화풀이도 갑질도 아님을 꼭 명심하자.


내가 찾아낸 컴플레인 방법은 내가 느끼는 감정에 fact를 더해 그 감정에 근거를 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함께 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심리적 부담과 상대의 감정이 상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는 전략이다.


물론 컴플레인 자체, 그러니까 누군가 나의 생각이나 방식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스트레스이다. 이렇게 fact로 근거를 달아준다 하여도 상대방이 나의 컴플레인을 하하호호 웃으며 받아들일 수는 없다. 

컴플레인을 해야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찌 되었든 상대방에게 반대표를 던져야 하는 상황이 유쾌할 리가 없다. 


그렇지만 이 방법은 서로의 감정은 지켜낼 수가 있다. 필요 이상의 불쾌감, 죄책감은 서로가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상한 감정을 걷어내고 컴플레인을 한 진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내가 느낀 불편을 전하고 그 불편이 개선되는 것. 물론 늘 원하는 방향은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불편을 해결한다는 것에서는 같다.

그런데 만약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면 컴플레인을 해서 얻는 것은 상한 감정일 뿐, 어떠한 개선도 발전도 이뤄낼 수가 없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컴플레인 성(?) 메일을 썼을 때의 일이다. 실무자 회의를 했는데 도저히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컴플레인 메일을 쓸 수밖에 없었다.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결국 상사의 컨펌을 받고 메일을 보냈다. 그들의 팀장님과 임원들을 넣어서. 지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손하지만 원하는 바를 얻도록 메일을 잘 쓰지만 그때는 세상 밤 잠 못 이룰 일이었다.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 없이 고민했으니까.


회의에서도 의견차가 있었고 이런 메일을 보냈으니 당시에는 그 상황을 전쟁 즈음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늘 불편하고, 에스컬레이션이 좀 높게 되면 실제로 아 전쟁이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런 전쟁을 몇 번 치르고 여러 감정싸움에 휘말리고 난 뒤 깨달은 바가 있었다.


1) 그래도 말을 하고 컴플레인을 좀 해야 해결되는 문제들도 있다는 것.

2) 그런데 잘못하면 작은 컴플레인도 서로의 감정의 골만 크게 키울 뿐, 문제 해결은 더 안 된다는 것.

3) 생각보다 감정이 상하는 것에 맷집이 빠르게 생기지 않는다는 점 (나는 그랬다. 그리고 서로 맷집이 다르기 때문에 컴플레인을 잘 못 다뤄 손해를 보는 쪽은 나였다.)


같은 말을 해도 나를 덜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를 정말 괴롭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사람인지라 나를 덜 괴롭게 하는 사람의 요청을 보다 정성스레 처리하고 그 사람과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괴롭게 했던 사람의 경우에는 그 일이 끝나고 나면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찔리시나요 당신?! 제게 그렇게 하셔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아직도 그러신 것은 아니죠?) 

이런 상황들을 여러 번 겪고, 나름 고심하며 내린 결론이 있다.


나의 불편한 감정과 적절한 근거를 정당히 전달해야 감정은 다치지 않으면서도 문제는 금방 해결된다는 것, 원하는 바는 더 빨리 얻는다는 것. 불편해도 입을 열어야 한다는 것.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그리고 비판이 아니라 비난을 하며 우는 소리를 하는 컴플레인은 그저 감정적인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나도 감정 폭력범이 될 수 있으니까.



(4)

컴플레인 잘 받는 법


앞서 말했듯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컴플레인에 능숙하지 않다. 컴플레인의 이점을 잘 활용하지 못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상한 컴플레인을 하는 사람이 많고 이로 인해 상처를 받고 분노하는 사람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좋다. 그것이 그들의 감정이니까. 그러나 선을 넘는 사람들이 많다. 컴플레인 거리를 찾은 것이 남을 막대해도 되는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은 것인 냥 아주 진상 짓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 옆에 있으면, 내가 다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정말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 듣는 법도 중요하다. 다치지 않고 잘 듣는 법.


컴플레인을 잘 받는 법을 요약하면 달삼쓰뱉이다. 달게 해서 삼키고 여전히 쓰기만 한 것은 뱉어 버리는 것. 컴플레인을 할 때 감정에 fact라는 근거를 달았는데 컴플레인을 받을 때는 감정과 fact를 분리시킨다. 감정은 줄여서 받고 (F형의 특성을 다 살려 과대 해석하지 말고! 컴플레인에 대하여는 그렇게 해야 건강하다고 본다) 사과할 것은 피하지 말고 마주하여 사과하는 것이다.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설명할 것은 설명하고, 받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도 fact를 근거로 받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해당 fact와 감정이 적절히 연결된 것이 맞는지 그 당위성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당하지 못하다면? 피해라. 무시해라.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면, 들어만 줘라. 들어주고 마음에 담지는 말자. 틀린 컴플레인이니까.



(5)

쓴소리를 들어야 할 때와 뱉어야 할 때가 분명 있다. 머뭇댈 필요는 없다. 사람이 살다 보면 무엇인가 때문에 불편해지고 그 불편을 담당하는 담당자에게 컴플레인을 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도 말자. 자신이 느낀 그 불편을 무기 삼아 상대에게 갑질을 하거나 짜증을 휘두르는 것은 폭력이고 못난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참 없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불편을 느낀 부분은 정정하도록 요청할 권리가 있지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나쁜 짓이라는 것을 분명할 터이다. (어쩌면 이 나쁜 짓은 반대로 컴플레인당할 일이다.) 


컴플레인을 하기만 하는 사람은 없다. 컴플레인은 주고받는 것이다. 그러니 마주해야 하는 감정이 두려워 컴플레인을 미룰 필요가 없다. 동시에 그 감정을 악용해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음도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는 나도 컴플레인을 받아야만 하고, 또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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