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심하고 충실한 F로 살고 있습니다만,
(1)
매일 꼬리가 아홉 달린 슬픔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입장에서 우리 F형들이 꼭 기억하면 좋겠는 마음가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좋은 저 사람이 내일은 싫을 수도 있다는 것이고, 반대로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 내어주고 아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너무 모든 것을 다 줘버리고 감정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에게 혹은 나에게 거는 무리한 기대에 다치거나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좋은 사람, 너무 좋아해서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면,
오늘 싫은 사람, 영원하지 않을 그 사람 때문에 너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오늘을 즐기고 오늘의 나를 지키며 살아냈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그리고 쟤한테도 일희일비할 자유를 허락했으면 좋겠다.
(2)
늘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그저 적당한 사람이면 된다. 어떤 날은 좋은 사람이었다가 다수는 적당한 사람이어도 괜찮다.
그날그날 충실하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대신 매일 더, 더, 더 나의 기쁨에 충실하고 슬픔은 그날 털어버렸으면 좋겠다.
오늘 좋은 저 사람에게 내일도 그래 달라고, 그래야 한다고 설레발 칠 필요도 없고, 오늘 싫은 저 사람이 평생 그럴 것이라 주눅 들 이유도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늘 좋은 저 사람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 내일도 그런 사람일 거라, 아니 어쩌면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줄 거라 기대하기 쉽다. 그런데 사람은 참 많은 변수를 마주하며 살아가기에 늘 좋은 사람일 수만은 없다. 그러니 일희일비한 그 사람의 태도에, 그로 인해 내 마음속에 새겨지는 감정들에 아파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런 날이 있는 것뿐이니까.
나도 마찬가지이다. 모두에게 모든 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노력할 필요는 없다. 나도 사람이니까. 힘든 날도 있는 것이니까. 적당한 사람이 되면 된다. 아! 당연히 나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적당한 사람과 나쁜 사람은 엄연히 다르니까. 나의 힘듦을 빌미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폭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3)
나 역시 늘 좋은 사람이고자 노력했다. 글로벌한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 바랍니다.’라고 메일을 쓰면 어딘가 시키는 것 같고 차가운 것 같아, 늘 ‘~ 부탁드립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영어를 할 때는 꼭 ‘Kindly’를 쓰거나 ‘Could you kindly’를 붙였다. 남의 잘못은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보다는 에둘러 표현할 때가 더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사실 내가 상처를 받아봤기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내가 받은 그 상처를 남에게는 주기 싫어서. 내가 아파하고 괴로워했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면 누군가도 똑같이 상처 받을 테니까.
해외 공장에서 일하는 단짝 동료 친구가 늘 내게 주기적으로 처방해주는 말이 있다. 모두에게 다 친절할 필요는 없다고.
* 이 동료 친구는 한국말을 아주 잘하고, 순댓국과 찜닭을 좋아하고, 거무튀튀하다 등의 한국 어감을 아주 잘 이해하는, 정이 아주 많은 금발의 (한국인인가 싶은) 현지분이다. 우리는 산전수전을 겪으며 친해졌고, 성격도 비슷해서 곧장 수다를 떨곤 한다. (메시지는 영어로 통화는 한국어로 한다. 이제는 영어 목소리를 듣는 건 어색할 것 같다.)
그녀는 나를 아주 잘 안다. 내가 Nice하게 사람들을 대하기 위해 얼마나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내가 한국에서 플래닝을 하면 그녀는 해외 공장에서의 실행을 담당한다. 내가 해외 공장 시스템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법이나 규정, 문화 등이 다르기에 그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우리는 같은 편이다.)
나를 지켜봐 주다가 나의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것 같으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준의 스트레스가 아니겠거니 싶으면) 조용히 메시지를 보낸다.
엉덩이를 차 버려!
그러면 나는 또 용기가 생겨서 숨겨왔던 나의 무서움을 보여준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논리로 내 주장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상대에게 제대로 처리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낸다. (왜 있지 않은가. 상상 속에서 남에게 쏘아붙이는 것. 그러다 보면 논리가 아주 단단해진다. 이미지 트레이닝이랄까)
그런데 또 특이한 건 이렇게 하면 나를 다 떠나갈 것 같던 사람들이 또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와 하하호호 즐거워지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 나의 무서움의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예전처럼 막 나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Nice 하기만 한 것을 포기하면, 일시적으로는 내 마음이 시원해지기도 불편해지기도 한다. 나도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고 호구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후련하다가도 결국 좋은 것이 좋은 거라고 얼굴 붉혀 뭐가 좋은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참 입체적이라 그런 일이 있은 후 또 다른 일을 함께 해나가며 부딪히다 보면 어느 날은 그 사람의 적당한 모습이 아니라 좋은 모습을 보게 되고 다시 가까워지고 하게 되는 것 같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도 있다.
(4)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매일 좋은 사람이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오늘 싫었던 저 사람이 좋아졌다가 다시 싫어질 수 있기에 (오늘 잘하다가 또 막무가내로 돌아서는 일도 있기에) 너무 큰 기대를 품고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말 친한 분들에게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다. 매일매일 나에게 좋은 사람, 무조건 베푸는 사람이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 당연한 데도 말이다. (여기서의 거절은 부탁에 대한 거절뿐 아니라 나의 의견이나 생각에 대한 반대도 포함한다. 오히려 그쪽이 더 많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많은 시간을 거치며 내가 깨달은 바는 다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일희일비하면서. 오늘 좋았다가 내일 싫었다가 일주일 뒤에는 다시 좋아졌다가. 나 역시 그런 입체적인 인간임을 기억하면 좋겠다. 그러니 모두가 일희일비할 권리를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일희일비할 자유가 있다. 나도 쟤도 언제나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 적당한 사람 정도면 됐다. F형들이여 이런 부분에서는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들을 좀 잠재워 주자. 그래도 괜찮은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