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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나 Oct 17. 2021

오지라퍼의 다짐

# 소심하고 충실한 F로 살고 있습니다만,

(1)

오지랖. 아마도 이것은 행동력까지 갖춘 F들에게 주어지는 훈장 같은 것이 아닐까? 오지랖에 대해 부정적인 느낌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걱정과 진심을 담은 오지랖은 오히려 관심의 표현이라고 다시 정의 내리고 싶다. F들에게 오지랖이란 마음에 드는 생각과 감정을 영 감추지 못하고 애정을 담아 그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견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한 때 나도 이 오지랖을 좀 나쁘게 평가했다. 나를 약하게 만드는 존재라고 말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누가 어려움에 처해있으면 솔직히 지나치지 못했다. 누가 알려달라고 사정한 것도 아닌데 모르는 것 때문에 업무 진행을 못하고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고, 남 일을 내 일처럼 걱정해주고. 핵심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다수는 이것에 참 고마워했다. 그러나 문제는 나였다. 나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과 푸닥거리를 한 판 하고 앞으로 저 사람은 하나도 안 도와줄 거야라고 다짐하고도 어느 순간 도와주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혹은 그렇게 도움을 받고 났는데 반대로 나는 도와주려 하지 않을 때 배신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서 직장인이 된 후 거의 매일 다짐한 것 같다. 오지라퍼가 되지 않겠다고. 손해 보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머리와 마음속에 새겨지는 수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을 애써 무시하려고도 했다. 

‘아.. 그렇게 하면 나중에 문제 생겨서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데..’ 알려주기 위해 메신저를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2)

그러나 언제고 결국 오지라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은 좋은 오지라퍼가 되기로 했다.

결국은 나한테 좋은 오지라퍼.


나의 오지랖으로 인해 도움을 받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친해진 사람도 정말 많았다. 서로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줄 아는 사람들도 정말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주는 충만함과 행복함보다는 몇몇의 못난이들, 그러니까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내어줄 줄은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겪는 아픔에 더 집중했던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 세월을 보내버리다니 후회가 되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릴 때 모두 무럭무럭 자라길 바라며 씨를 뿌린다. 그러나 무럭무럭 자라나는 씨앗도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씨앗도 있다.

그래도 농부는 매년 농사를 짓는다.

무럭무럭 자라나 가족의 생계가 되어주고 즐거움이 되어주는 그 몇 알의 씨앗 때문에.

그렇지 못한 몇몇의 씨앗 때문에 농사를 포기할 바보 같은 농부는 없다.


나도 이 농부처럼 되기로 하였다.

오지라퍼가 되어 상처를 받는 일도 많겠지만 그 상처를 두려워하여 수확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보다는 내 주변에서 함께 자라고 있는 기쁨, 희망, 행복, 따뜻함, 위로 등의 작물들이 주는 즐거움에 더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3)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죽을 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그 말을.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단 한 마디를. 딱 한 마디만 할 힘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것이었으면, 따뜻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고맙고 행복했다고. 


앞서 말한 것처럼 매일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지만 좋은 사람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노력이 배신하지 않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그 순간들과 그때 흘린 땀방울에 (혹은 어쩌면 눈물에) 좋은 사람들과의 멋진 순간이 송골송골 맺힐 테니까. 


내가 죽는 그 순간 나의 기억들이 모이고 모여 나의 마지막 한 마디를 결정할 것이다. 그때 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노라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있는 것 같다.


사실 최근 나의 소중한 한 분이 천국으로 돌아가셨다. 그분의 장례를 지켜보며 똑똑하고 분명하게 깨달은 바가 있다. 돈과 명예로 점철된 화려한 삶은 아니었지만 몇 번을 돌아서서 영정사진을 지켜보고 함께 울어주는 좋은 친구들이 많았던 삶, 그분처럼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함께 어우러질 줄 알았던 삶. 시니컬한 누구는 남 일에 관심이 뭐 그리 많으냐며 구박할지도 모르는 삶이지만, 그 진심 어린 관심을 알아봐 주는 많은 사람들을 차곡차곡 곳간에 모은 값진 삶. 


그래서 더더욱 그냥 오지라퍼로 살기로 했다. 나는 그게 맞는 것 같다. 몇몇의 쭉정이 때문에 나의 곳간을 비울 수 없는 법. 서로 관심 갖고 아껴주며 때로는 도움을 주기도 받기도, 투닥거리기도 하는 사람 냄새나는 그런 삶.

그냥 나는 그런 삶을 선택했다.


차도녀, 차도남 등의 단어들이 한창 유행하고 시니컬하고 시크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된 적 있다. 나는 그 반대의 삶을 살고 싶다. 남 일에 관심도 많이 갖고 내 일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길 바라며,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친구들을 가득 모아둔 삶 말이다. 


스테이크 같은 삶 말고 돼지갈비 같은 삶이랄까? 

다 같이 한 불판에 둘러앉아 양념이 타지 않게 함께 앞뒤로 뒤집으며 호호 불며 나눠 먹는 그런 삶. 1인 1 스테이크는 조금 정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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