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나 Oct 17. 2021

힘이 들 땐 동굴로 꽁꽁 숨겨주세요.

# 소심하고 충실한 F로 살고 있습니다만,

(1)

우스갯소리지만 가끔 누가 내 노트북을 좀 뺏어가 줬으면 생각하곤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어떠한 생각도 행동도 못하게 나를 멈출 수 있도록.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좋은 얘기만 듣고 살 수는 없다. 가끔 핀잔도 듣고 혼나기도 하고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욕도 먹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상황은 피하고만 싶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모두를 배려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내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넘쳐나는 이유이고 누가 강제로라도 나를 그 상황에서 꺼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계기이다.  


기쁨도 더 크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F형의 장점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슬픔도 더 크게 느끼고 있다. 그 슬픔이 무엇인지 알기에 우리는 그것을 피하려 안간힘을 쓴다. 우리에게 강한 책임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슬픔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더 열심히 애쓰며 사는 것이다.

(물론! 내가 받게 될 혹은 받은 피드백으로 인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도 옳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이야기해보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과로하게 된다. 더 많은 일들에 우리의 정성을 쏟기 때문이다. 정성을 쏟으면 쏟을수록 깊이 관여하게 되고 결국 그 일과 관련된 또 다른 일들에까지 관여하게 된다. 결국 더욱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우리의 온 신경은 그 전보다 더 바삐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들어오는 자극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 → 사람과의 관계 형성 → 신경 쓰임 → 정성 쏟음 → 더 깊이 관여함 → 더 많은 일을 하게 됨 → 더 많은 사람과의 관계 형성 → 반복!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전부 고갈되는 순간이 찾아오게 된다.



(2)

실제로 노트북을 뺏기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다. 책임감과 괴로움, 체력 고갈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제적으로라도!


마치 컴퓨터가 느려지거나 멈추면 강제로 재부팅하는 것처럼.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내가 실천하고 있는 ‘강제 종료’, ‘강제 휴식’에 대해 나눠보고자 한다. 

나의 멈춤의 핵심은 온전한 단절과 나의 역할에 대한 공백이다.



(3)

나의 휴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겪은 번아웃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게 휴식이 얼마나 간절한 일인지 충분히 전달하고 싶으니까!


프로젝트 매니저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더 많은 책임감이 요구된다. 결국 프로젝트의 모든 상황, 결정 등이 프로젝트 매니저들에게 모이고 프로젝트 매니저들은 그 모든 정보들을 종합하여 미래를 계획하고 이슈에 대응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의 대다수가 내게 공유되고 함께 해결을 해내가다 보니 업무량은 늘 많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반응 등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아무리 일이 많아도 강약 조절을 잘하며 적절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내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보내는 것이 싫어, 더 정확히는 그런 부정적인 피드백에 내가 상처 받는 것이 싫어 모든 사람과 이슈에 정성을 쏟았다. 강약 조절도 없이.


그러다가 결국 뻥! 하고 터진 것이다.


재택근무를 하던 여름이었다.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유난히 여름에 일이 많았다. 하계휴가를 한 번도 여름에 써본 적이 없을 만큼 여름은 늘 일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대무를 해줄 수는 있겠지만 온전한 대무가 어려워 화급을 다투는 일이 있다면 휴가를 미루고 미루었다. 그래서 늘 여름 즈음에는 피곤과 피로를 달고 살았다.


재택근무까지 하니 더 피로했다. 누군가는 통근시간을 줄이면 편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재택근무의 가장 큰 단점이 맺고 끊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회사 노트북이 늘 내 앞에 있고 일과 삶의 공간이 분리될 수 없으니 눈뜨면 일이고 노트북을 닫아야 잠에 들 수 있는 것이다. 통근시간 아껴서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해야 하나? 매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근래 이슈가 너무 많았고 나는 이슈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심지어 당시에는 크고 작은 개인적인 일들도 많았다.


수요일에 이슈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여 노트북을 닫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두개골과 뇌가 분리되는 느낌이 들면서 머리 안에서 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럽고 뇌에 찌릿찌릿 전기가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강제로 목요일부터 주말까지 정말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다. TV 한 편을 온전히 다 보기 버거울 정도로 머리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어지럽고 힘이 없어 잘 걷지도 못했다.


휴일에도 어느 정도 대응하던 업무 연락은 그냥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연락을 받을 힘도 없었을 뿐더러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나의 존재가 공백이 되었던 것이다. 


사회와의 단절이었는데 해보니 퍽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짜릿했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게 하던 생각들과 멀어지고 새로운 괴로움 거리도 생기지 않으니 평안 그 자체였다.


솔직히 강제 휴식 1일 차에는 적응이 어려웠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안 해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시간이 흐르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2일 차부터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고 시간을 잘 흘려보냈으며, 그런 내 모습이 자랑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무조건 휴식’이라는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이슈가 정말 많을 때는 24시간을 다 나의 공백으로 채우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지만 하루 몇 분의 단절과 공백이 아주 큰 변화를 만들었다. 그 효과를 톡톡히 본 나는 지금도 꾸준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쉬고 나니 무엇인가를 할 에너지를 얻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쉬고 나니 기분이 좋아서! 그냥 행복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4)

1.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아무런 연결도 없는 시간

     

먼저 반드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내가 가장 차분한 시간(기상 직후 새벽 5시)과 내가 가장 지친 시간(오후 5시)에 아무것도 안 하는 ‘멈춤’을 만들어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은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고 오롯이 혼자 있다는 뜻이다. 물리적으로 뇌를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해야만 해서 하고 있는 일들을 멈추고 재미있을 것 같은 일들을 시도하는 시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세상과도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좋다. 적어도 그 시간에는 카톡, 메신저, 메일 등은 열지 않고, 대신 읽고 싶었던 책을 읽거나 예능을 몰아보면서 먹고 싶던 음식들을 먹는 등 행복한 일들만 가득 채우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기상 직후부터 출근 전까지 해야 할 일들(개인적인 일들 혹은 너무 바쁘면 업무처리)을 처리했다. 그렇게 시간을 아끼고 아껴 많은 일들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휴식을 다짐하고 나서는 시간이 흐르는 대로 나도 함께 흐르려 하고 있다. 너무나 많은 일들에 정성을 쏟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오히려 스마트폰을 내려두고 내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들에 집중한다. 온전히 나의 선택이 아닌 일들은 모두 배제하고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즐긴다. 따뜻한 차를 곁에 두고 책이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가끔은 운동을 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기상한 자세 그대로 유튜브 동영상들을 보기도 한다.


오후 5시 휴식은 회사에서 보낸다. 뷰가 예쁜 휴게실 창가 자리를 찾아가 그저 간식을 먹고 뷰만 구경한다. 오후 5시는 2 ~ 3시부터 시작하는 고객사와 해외 공장들과 회의, 연락 등의 피크타임을 어느 정도 넘긴 시간이다. 물론 5시 이후에도 회의와 연락은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그 시간의 중간을 딱 잘라 쉬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무음 모드를 해놓고 자리에 두고 간다. 몇 분 단절되어도 별 일은 없다. 


특히 우리 F형들에게는 이러한 멈춤과 단절, 공백이 휴식의 핵심이다. 세상과 연결만 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모든 시간에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쏟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과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생의 시기에 따라 사람들 속에서 아주 바쁘게 살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너무 세상과 다른 사람이 보내는 피드백에 매몰되면 우리의 뇌와 마음이 쉴 수 없기에 아주 잠깐이라도 세상과 단절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를 돌보고 살피기 위해서. 


2. 아무것도 안 하는 장소

     

아무것도 안 하는 장소도 마련했다. 침대 옆 공간에 좌식 테이블과 등받이를 가져다 두었다. 휴식을 다짐하고 난 후 마련한 것들인데 출근시간 전까지는 이곳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곳에서는 하고 싶은 좋은 일들만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다.)


원래 내 방에는 사무실 책상보다 훨씬 큰 책상이 있다. 내가 각종 시험들을 준비하며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해오던 것이다. 그러나 방에 이렇게 큰 책상이 있으니 뭔가를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았고 일의 맺고 끊기를 잘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과감히 책상 의자를 빼버렸다. 사실 아예 버리고 싶었는데 또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 아예 빼지는 못하였고 대신 의자를 뺀 것이다. 그리고 방에서는 되도록 괴로운 일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방이 온전한 휴식의 공간이 되도록. 얼마나 간절했는지, 가끔 급한 업무 연락이 와도 거실에 나가서 받았다. 내 방이 아닌 곳에서.


종합하자면 내가 온전히 쉬기만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는 마치 동굴에 숨어 있는 것처럼 의무감과 걱정, 근심들에서 멀어져 보려 노력해보자. 그렇게 나에게 내가 나를 위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을 보내보자.



(5)

우리 F형들의 휴식에는 반드시 단절이 필요하다. 생각과 감정이 꼬리를 물지 않도록 강제로 끊어내는 그 시간. 이러한 단절이 우리를 보다 행복한 F형들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추신)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의 미래의 남편님! 부디 제 노트북을 잘 숨겨주시고 휴식의 공간과 시간을 잘 만들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전 08화 오지라퍼의 다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