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조금 늦장을 부렸더니 늦었다. 저녁이 되기 전에 산을 만나러 가야 한다. 곧 해가 지려고 한다. 공원으로 막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꾸욱꾸욱 떡국떡국 하고 새가 운다. (내 귀엔 정말 이렇게 들렸다) 바람을 타고 이름 모를 향기가 여기저기서 뿜어진다. 내 숨길이 아주 잠깐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그 느낌이 좋다.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과 산책을 하고 있다. 온몸의 털을 살랑거리며 잘도 걷는다.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는 게 느껴진다. 아무도 모르게 빨리 좀 걸으라고 발에게 재촉을 하지만 소용이 없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장소가 있다는 건 행복한 거다. 그런 자리에 나는 오늘도 앉아있다. 밤나무인지 참나무인지 신분은 모르지만 내 키를 훌쩍 넘어 서너 배에 달하는 어르신 나무가 듬직하게 그늘을 내어주는 자리. 나에겐 명당이다. 아직 남아있는 햇빛에 이파리들이 사라락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바람이 길을 내어준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새들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기들이 있다는 걸 내게 알린다.
아궁이 불쏘시개로 낙엽이 쓰이지 않은지 오래라 아직 봄인데도 낙엽들이 수북하다. 그 곁으로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가 보였다. 아마도 길을 내기 위해서 위치상 자리를 내어준 듯하다. 선택권이 없기에 그 쓰임이 안쓰럽고 고맙다.
그렇게 같은 자리에서 햇살에 얼굴을 비비고, 바람에게 길을 내어준다. 어떤 슬픔도 외로움도 끝내는 지나간다는 것을 나무는 알고 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도 너무 기뻐하지도 말라고 한다. 바람이 불고 다시 햇살이 비치면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삶은 살아지는 거다. 한 자리에서 수십, 수백 년을 살아온 그들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삶은 살아지는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나무는 같은 자리에서 태어나 죽는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