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없는 황폐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가족이 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외동아들. 3명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사랑이나 힘이 되지 않는다. 서로는 서로에게 저주를 퍼붓는 존재일 뿐이다.
부부는 각자 애인이 따로 있다. 자신들의 애인에게서 위안처를 삼는다. 그러나 고작 12살 먹은 외동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 애인도 없고 친구도 고작 1명이다.
부부는 나이도 꽤 있고 직업도 있고 돈도 있고 각자 애인도 있다. 서로를 만나면 저주를 퍼붓고 싫은 소리를 해대며 일부러 싫어하는 짓거리를 하면서 아픈데를 건드린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어한 뒤 각자 애인에게로 돌아간다. 그들에게 애인의 정의는 힘들고 외로울 때 가서 안길 수 있는 곳이다.
12살짜리 아이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끅끅 울음을 참아본다. 이 아이는 증오하는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났으니 사랑의 결과물이 아니라 증오의 산물이다.
사랑의 결과물이 아닌 존재가 겪는 것은 단순한 사춘기라 할 수 없다. 환영받지 못해서 슬픔을 겪고 존재까지 부정당하는 아이가 겪는 슬픔은 얼마나 클까.
아이가 겪는 것은 사춘기를 넘어서는 존재론적 물음일 것이다. '나는 대체 왜 환영받지 못한 채로 태어났을까.' '나는 저 서로 분노하고 증오하는 부부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나 존재자체로 말썽인걸까.' 벌써 그 사실을 알아챈 아이가 마음을 붙일 곳이 어디일까. 대체.
아무데도 없을 것이다. 이 불쌍한 아이가 그렇게 집을 떠나서 실종됐다. 부부는 아이를 찾아 나선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있는 염치때문에 아이를 찾는 것일 것이다.
아이의 실종이 그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을가? 자신이 서로에게 지닌 증오때문에 아이가 실종됐으니 증오를 가라앉히고 다시 잘해보자고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의 실종은 그들을 더 증오하게 만들고 더 싸움을 붙인다. 더 싫어하게 만들고 서로의 탓을 해댄다.
이 영화는 그 여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랑이 없어 황폐함과 분노만 가득한 사람들이 펼쳐내는 황무지가 계속 펼쳐진다.
감독이 만들어 낸 세계는 너무나 지독하게 황폐하다. 사실 현실은 이정도까지 사랑이 없는 세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서로를 향한 그 엄청난 분노와 증오에 완전히 생명력을 잃을 수 있는 아주 연약한 존재도 있다는 것이다. 아주 연약한 존재는 증오속에서 그 황폐함 속에서는 완전히 바스라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