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al the show 7

메리크리스마스

by 티니Tini
Steal the show 7


메리크리스마스! 사랑해, 연아.


연은 원과 보냈던 지난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생일마저 무감각 해져버린 연과 달리 원은 여러 기념일을 빼놓지 않고 챙기는 편이었다.


세계 요가의 날에는 인도 대사관에 주최하는 단체 요가 수업을 받고, 세계 이모지의 날에는 이모지로만 대화하는 원.


연은 원과 만날수록 몰랐던 기념일들을 알게 되었다.


그날의 침대, 보통 원과의 장면은 침대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연이었다. 한 시간 거리에 사는 둘은 금요일 퇴근 후에 만나 주말을 함께했다. 꼬박 3년이었다.


연애 초반에는 어느 연인들이 그렇듯 카페-식당-펍 등을 일명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들을 전전했다.


서로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모습들이 늘어갈수록 집 데이트가 잦아졌다. 원의 집에서, 연의 집에서 속옷, 잠옷, 양말들만이 늘어갔다.


원은 집에만 오면 재빨리 씻고 잠옷을 갈아입고 이불속으로 폭 들어가기에 바빴다. 시간이 이른 오전이든, 잠이 솔솔 오는 오후든 그녀는 빼놓지 않고 그러했다.


그날도 원은 침대에서 누워 꽤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책을 읽는 중이었고, 연은 그 옆에서 며칠간 쌓인 양말 빨래를 개는 중이었다.


하나 두 개 개다 보니, 어느새 알록달록한 양말 바구니가 완성되었다. 검정, 파랑, 핑크, 주황, 얼룩말. 둘의 취향이 마구잡이로 섞여 들어갔다.


원은 양말을 꼭 색에 맞춰 개지 않기 때문에, 양말은 꼭연이 갠다. 검정과 노랑 양말이 함께 말아져 있을지 모른다.


원에게는 겨울 습관이 있었고 연은 습관은 계절을 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은 겨울이면 가장 큰 사이즈 아이스크림 통을 아몬드초코맛으로 꽉꽉 눌러 담고는 로맨스 영화들을 연달아서 보았다.

그 중 미비포유는, 원이 무조건 울어버리고 마는 영화였다. 지나가다 그 영화가 생각나서 원에게 선물한 노란얼룩말양말을 그녀가 어찌 좋아하던지, 원의 웃는 모음이 자꾸만 마음에 남는 연이었다.


연이 지나간 연인들을 떠올렸을 때, 원은 가장 솔직한 편이었다. 좋다. 싫다. 기쁘다. 슬프다. 고맙다. 불편하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원의 감정은 늘 직선으로 연에게 닿았고 연은 원에게는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닿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해달라는 걸 해주는 게 사랑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이 하기 싫다고 하는 것을 이해해 주는 게 사랑 아니야?”


연은 원과 늘 같은 주제로 싸웠다. 원은 연에게 더 표현받기를 원했고, 연은 이미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원의 사랑은 내린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드는 행위였고, 연의 사랑은 내리는 눈을 맞는 행위였다.


원과 만난 첫해의 크리스마스도 그러했다. 크리스마스를 꼭 함께 보내야 한다는 원이라, 연은 전날부터 장을 보고 원을 먹일 여러 음식을 기꺼이 준비했다.

원은 소원이 있다면 편지를 같이 쓰자고 했다. 직접 골랐다는 편지지와 아끼는 볼펜. 연은 숨까지 죽이고 편지를 쓰는 원과는 달리 쉽사리 편지를 적어 내리질 못했다.


펜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핸드폰을 봤다가, 편지지를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연아, 적고 있지?”

“응? 응.”


원은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편지를 이어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메리크리스마스. 사랑해, 원아.

원은 한바닥을 적어갈 동안 연은 한 줄을 적어 내렸다.


[메리크리스마스. 사랑해. 연아. 퇴근하고 피곤했을 텐데 수요일의 크리스마스를 위해 장도 보고 요리도 해줘서 고마워. 떡볶이 먹다가 단무지가 떨어지면 바로 달려가서 채워오는 것도, 걸을 때는 차가 오는 편으로 자연스레 방향을 돌리는 것도, 네 손바닥만 한 내 가방을 들어주는 것도, 바닥에 엎드려 신발 끈을 묶어주는 것도 연의 사랑임을 알아. 난 다 알아! 연아, 고마워. 다음 해의 크리스마스도, 그 다음 해의 크리스마스도 잘 부탁해.]


[메리크리스마스. 사랑해, 원아. 항상 잘 부탁해.]


원은 너무나도 짧은 연의 편지를 오래오래 읽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었다, 연은 말없이 그런 원을 기다렸다.


너무 짧은 편지에 혹시 조금 삐졌는지, 어딘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원의 낯을 읽기 위해 눈치를 살폈다.


고개를 돌려 연과 눈을 마주친 원은 볼펜을 들어 연의 손등에 자그만 빨간 하트를 그려 넣었다. 연도 원의 손을 들어, 그렇게 했다. 손등에, 팔뚝에, 어깨와 쇄골 틈, 등에 자그마한 빨간 하트를 그려 넣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눈이 펑펑 왔다.

원은 손이 시린 것도 모르게 눈사람을 만들었다. 옆에서 연도 그렇게 했다.


시린 손이 붉어졌고, 하얀 김이 퍼졌고,

마주칠 때 마다웃음이 터졌다.


눈가에도, 입가에도,

어젯밤의 흔적으로 얼룩진 둘이 있었다.


다음 해도, 그 다음 해도

둘은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첫 해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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