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2002]【4】실연의 늪

잔인한 계절 2월을 끝자락에서

by 짜근별

2002.02.28 [일기]잔인한 계절 2월을 끝자락에서..

2월은 정말 잔인한 달이다.
올해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ㅡ.ㅡ?

가뜩이나 짧은 날수를 헤아리다 보면 어느덧 봄의 문턱을 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새해가 시작한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두달이라는 시간이 후다닥 지나가 버린걸 느낀다.
그리고 뒤돌아 본다.

'내 새해 결심이 모였드라..'
'봄에는 무엇이 또 나를 기다리지?'
'또 달력 한장이 찢겨 나가는 구나....'

하릴없는 날 수 세기.
짓눌려 땅바닥을 박박 길 것만 같은 마음.
생각의 틈을 주지않고 3월로 몰아가는 세월의 격랑 속에
그렇게 또 한살 내 청춘의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그게 2월이다.

가끔... 아니 자주...
가슴 한켠이 실컷 저며온다.
그리곤 눈에 눈물이 가득 괸다.
난 그렇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싫다.
이런 느낌.
싫음의 크기만큼
내 존재가 싫어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가라앉는다.
기억의 저편으로
그리고 눈을 감는다.
기억을 더듬기위해
그리곤 다시 눈을 뜬다.
그럼 현실이 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나.
그렇게 커다란 대 우주라는 공간에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세상일이 얼마나 덧없는지 인식하다기도
결국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절망과 희망과 고통과 슬픔과 번민과 기쁨과 아픔과 좌절과 오욕이 혼재되어 뒤섞여 버린 공간...
그리고 꿈을 꾼다.

'내게도 해뜰날 오리라'

하지만 그렇게 쉽게 세상이 나를 맞이해 주지는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의 입구에서 바늘 크기만한 한 줌의 빛을 보며
걸어가야하는 참담함이 기다리고 있다.
빛이라도 보이면 그나마 행운이다.
알 수 없는 끝을 벽을 짚어가며 가야하는 나.

'끝에 가봐야 무슨 소용이지'

문득 이런 생각이 엄습해 온다.
주위를 둘러본다.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각자의 길에 숨을 헐떡이며 무릎을 짚고 있다.

그게 인생인 것 같다.

지친 머리를 살며시 옆에 기대 보지만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혼자 가기도 힘든 길이기에
짐이 되는 내 존재의 무게를 벗어버린 현명한 그녀다.

몰입은 현실의 긴 터널을 헤쳐나가게 해주는 고속도로와 같다.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순간
난 뒤쳐져지게 된다.
흐름을 따라가면 안된다.
흐름을 앞질러가서 세월이 뒤따라오게 하리라.


겨울의 냉기가 아직 거리를 감싸고 있던 2월의 끝자락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내가 보인다. 감정의 과잉이 느껴지지만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는 것은 그때는 정말 절실했기 때문이리라. 정말 할 수만 있다면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 '괜찮다'고 '다 지나갈 거야'라고 하면서 나를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2002년초 실연의 아픔이 그해 내내 꽤 오랫동안 깊이 이어졌다. 이제는 추억이란 말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때의 나는 밑바닥이 어딘지 모르게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늪에 갖힌 사람처럼 생활은 허우적 거렸고 속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정말 견딜 수가 없어서 평상시에는 연말 동문회에서만 보는 친분도 별로 없는 정신과 의사가 된 고등학교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달라고 부탁을 했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면서였다.


그 정도로 내 정신이 무너지고 피폐해질 줄은 나도 몰랐다. 첫사랑의 이별은 꼭 백신과 같다. 나는 내 삶에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런 종류의 고통을 그 정도로 깊이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난 그녀를 나보다 더 사랑했었다.


시련은 꼭 한꺼번에 몰려온다고들 한다. 마음이 아프니 평상시 아무일도 아닌 일도 고통이 되어 오기 시작했다. 석사 2년차가 시작되니 지도교수님이 학위논문의 주제를 선정해 주셨고, 기한들을 맞추어서 제출해야하는 여러 정부 연구기금 신청용 제안서들이 쌓여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 2003년 가을학기에 맞추어 유학을 가려면 토플과 GRE 등과 같은 어학시험들과 자기 소개서, 추천서 등의 입학 지원서류 등도 차근차근 준비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1년 연구실적에 사활을 걸어야 미국 대학원 어드미션을 받는데 유리한데 이 모든게 짐이었고 무기력은 내 생활을 집어 삼켰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이 때 마음이 나서서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 치면서 했던 것이

시도때도 없는 글쓰기(일기, 편지 등등)였고,

자취방 바로 옆 위에 있는 중학교 운동장을 어둑어둑해지면 나가서 몇바퀴건 무조건 뛰었다.

동네아주머니들이 조그만 아령을 들고 속보하는 옆을 트랙따라 미친듯이 달렸다.

찬기운이 얼굴을 파고 들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무심한 시간은 내 의지와 바람과는 상관없이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내 마음의 평화가 조금씩 조금씩 상실을 마음 속에서 밀어냈다.


봄이 저 앞에서 성큼성큼 먼저와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고,

거리는 그해 6월에 있었던 월드컵으로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계속)


※세 개의 에피소드를 한꺼번에 쓰다보니 시간적으로 겹쳐서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네요.

이야기들이 시간적으로

[이별後愛]: 2001년 초 ~ 2002년 가을

[응답하라2002]: 2002년 초 ~ 2003년 가을

[삶, 사람, 사랑]: 2003년 말~현재

인데,

현재 2002년 초의 내용이 겹쳐서 뜻하지 않게 '[이별後愛]'의 스포일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첫번째 '프롤로그'를 읽으세요.


[이별後愛] - 눈부시도록 찬란했던 하지만 처절하게 가슴시렸던 첫사랑과의 만남과 이별

[응답하라2002] - 간절했던 꿈을 향한 유학도전기와 X세대 친구들의 20대시절 고민과 만나는 추억 여행

[삶, 사람, 사랑] 유학, 이민 생활 동안 떠오르던 단상과 고민들 그 일상 나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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