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람, 사랑| [10] 아리랑

그들에게 6월이 오면...

by 짜근별

2006.05.22 그들에게 6월이 오면...


왠지 모르게 심난한 마음에 시끌벅쩍하고 온갖 '날'들로 덕지덕지 기워진 5월의 달력을 찢어버리면

(5월의 들뜸은 한국이고 미국이고 마찬가지다. 아.. 우리에겐 중간에 5.18이 있기는 하네.)

6월이 떡~ 하니 나타난다. 6월이 가져오는 왠지 모를 중압감...

'현충일'과 '육이오'는 그렇게 6월의 초입과 말미에서 우리에게 무언의 의미를 던지고 있다.


얼마전 교회 여성 중창단 모임인 '큐리아' 멤버인 아내가

한국전 참전용사 모임에 정식 초청을 받아 공연을 갈 때 따라갔다.

(미국의 Memorial day는 매년 5월 30일이다.)

작년에도 초청받아 갔었지만 나는 사정이 있어 참석을 못했는데

올해는 일부러라도 꼭 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국에서 한국전쟁을 떠올리며 불현듯 떠오르는 몇 가지 만감들......

그들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에게 그들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게 미국은 어떤 의미일까?

미국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작년에 2곡을 준비해 갔는데 뜻하지 않은 앵콜을 받고 당황해서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어물쩡 넘겨서

올해는 2곡에 비장의 카드로 앵콜곡을 따로 준비해 갔는데 앵콜 요청이 안 나왔다.

그래서 처음에 2곡이라고 소개하고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나중에 실은 하나 더 준비했다고 자진납세하고 불렀다.

곡명은 '아리랑'이었다.


전장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살아남은 백전용사들이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들이 되어 있었다.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훈장들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군용 정복들이

그들이 바로 Korean War Veteran들이라는 것을 말해 줄 따름이다.

56년전 그들은 한국전 발발 직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작년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올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에 내년에 이 자리에 없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국전쟁은 점점 우리들 세대와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가듯이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현실의 자취 속에서 하나둘씩 시나브로 사그러져 가고 있다.


아리랑이 나지막히 흘러나오자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기저기서 노병들이 음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곧 홀을 가득 채워갔다.

내 앞에 앉아있던 한 노병은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눈시울을 적시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수십년전 이억만리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듣던

우리 민족의 '아리랑'이 그들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을까?

한 노병은 반세기 전 처음 '아리랑'을 접했을 그 때의 감정을 전하려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 다가와 그 때의 이야기를 전하며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부부동반으로 참석한 한 노부인은 모든 노병들의 심금을 울린 그 노래에 감동을 받았는지

떠나려는 우리를 붙들고 그 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기억은 그렇게 축적되어 나이를 넘어서는 거대한 꿈틀거림으로 사람들에게서 살아 숨쉰다.


한 현역 군인이 초청받아와 현재의 정세를 논하며 이 노인들에게 그들의 무용담을 바탕으로

젊은이들의 군대 지원을 독려하라고 열변을 토했다.

전쟁의 대의 명분이야 어쨌든,

애국심이 어쨌든,

그렇게 전장에서 소중한 생명의 불꽃을 불사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와 일정 거리를 두고 삶의 지탱으로서 군인이라는 직업을 택한 민초들이다.

한국전의 명분이야 어쨌든,

한 인간으로서

삶의 가장 정점인 20대 초중반에

전쟁의 참화 속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한국을 느끼고 경험했을 그들에게

자그나마 존경과 경의를 표해본다



"The Forgotten War"

잊혀진 전쟁.


한국전쟁을 지칭하는 공식적인 영어 명칭이다. 제2차 세계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끝자락에서 국지적으로 일어났고, 미국에게는 확실한 승리를 안겨주지 않은 전쟁이었기에 이렇게 불리운다. 하지만 21세기도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재, 한국전쟁은 말 그대로 모든 세대에게 잊혀져 가는 전쟁이 되고 있다. 이 일기를 쓴 것이 벌써 20년 전이다. 저 당시 호텔 행사장에 수십 명의 한국전 참전 용사분들이 참석했었었는데, 그분들 중 도대체 몇 분이나 살아 계실지 궁금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전반적인 기억은 흐려져 가지만, 오히려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기억의 각인은 더 선명해져 간다. 수십년 전에 들었던 가사의 발음도 뜻도 잘 모르는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한자 한자 따라부르는 행사장 홀을 가득 채우던 노병들의 눈물 섞인 노랫소리의 감동이 아직도 느껴진다.


분단의 아픔을 딛고 그들이 목숨 바쳐 지켰던 자유의 땅에 부디 평화가 깃들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계속)


*이 글을 읽기 전에 첫번째 '프롤로그'를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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