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는 법
가을의 기도(祈禱)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 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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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무더위가 널을 뛰던 2002년에도 가을은 그렇게 어김없이 오고 있었다. 나는 그 가을 진정으로 내 꿈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여기 그릇이 있다.
무언가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더 담으려고 해도 담겨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난 안에 있는 것을 꺼내서 버리려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꺼내려고 안에 있는 것을 뒤져봐도 무엇하나 버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다.
여기 마음이 있다.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지금 내 앞에는 정말 담고 싶은 꿈이 하나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꺼내야만 한다.
고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하나하나 뒤져서 꺼내기엔
마음이 너무 아파하기에
한꺼번에 다 쏟아 버리고
꿈을 가장 안쪽에 담았다.
그리고
다시 담을 것을 고르고 있다.
:
그릇을 비우면 물건을 담을 수 있고,
마음을 비우면 길을 얻는다.
오늘도 나는 마음 비우기를 하고 있다.
정말로 비우면 비로소 길이 보인다.
가로등도 다 꺼져버려 잘 보이지 않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주위엔 아무도 없고 다만 나와 적막함만이 주위에 맴돌 뿐이다.
코 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차가움을 머금고 가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초롱초롱한 별들이 얽어져 있다.
그리고 다시 갈길을 재촉한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사로 잡는 7개의 별...
가는 걸음을 멈춰서서 멍하니 바라본다.
'오리온자리'
겨울밤 한가운데 남쪽 하늘에 나타나는 '오리온자리'가 어느새 여름의 뜨거운 열정이 겨울의 차가움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난 오리온 자리를 제일 좋아한다.
하긴.. 내가 하늘에서 알아낼 수 있는 별자리가 네댓 개밖에 안 되지만...
어쨌든..
4개의 사각형 속에서 비스듬히 일렬로 나란히 빛나는 3개의 별은 친근함 그 자체다.
겨울 별자리의 왕자라 해도 손색이 없는 7개의 주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화 속 사냥꾼 오리온의 이야기 속으로 나도 모르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그러곤 하루를 마무리하는 발걸음이 집으로 향하고 있는 나를 느낀다.
또 그렇게
하루가 갔다.
도서관에서 자정 넘어 집에 가는 길이 일상이었던 시절.
한국의 이른 새벽녘의 신선한 향기와 깊은 밤의 자유롭고 아늑한 정취가 그립다. 텍사스 새벽녘의 그 무미건조함도 여기를 떠나고 나면 그리워질까? 어젯밤 총기사고가 났다고 떠들썩하게 대서특필하는 지역 뉴스를 보면서 늦은 밤 외출을 삼가해야 하는 이곳의 치안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한국도 기후 변화로 봄·가을이 짧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극단적인 두 개의 계절(조금 덜 더운 여름과 정말 더운 여름)밖에 없는 이곳에서 가장 그리운 것이 한국의 봄 가을의 정취이다.
(계속)
*이 글을 읽기 전에 첫번째 '프롤로그'를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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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2002] - 간절했던 꿈을 향한 유학도전기와 X세대 친구들의 20대시절 고민과 만나는 추억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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