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가지
아주 어릴 적 난 전라도 남원,
거기에서도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에 살았다.
앞쪽에는 '고남산'이 굽어 내려보고 있었고,
뒤쪽에 이름모를 낮은 산자락에서 이어져 내려온 줄기 끝에 우리집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신작로가 나면서 지금은 시야를 가려버렸지만 우리집 대문에서 고개를 쭉 내밀어 보면 넓은 황금물결 사이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한 줄기가 우리마을 앞마당을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주 '보통 근동에서는 논 '한 마지기'에 200평인데 여기는 150평이 한 마지기야'라며 은근히 땅이 비옥하다라는 암시를 실어 말씀하시곤 했다. 한반도 최대의 곡창지역이자 그 구수한 사투리와 지리산의 장엄한 숨결이 살아있는 전라도 남원, 그 곳이 아따 내 고향이랑께.
어릴적 친구들과 어울려 앞 냇가에서 멱감고,
다래 머루따서 입술이 시커멓게 물들도록 먹고,
마을 중심의 정자나무 밑에서 친구들과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하고 놀고,
우리 집에서 하던 수박밭 원두막에 앉아서 수박 참외 쪼개 먹고,
옥수수며 고구마밭 흙내음,
미나리깡의 그 알싸한 향긋함,
개구리 잡으러 이 논으로 저 논으로 왔다갔다 했던 그 천진함,
할머니, 어머니 손 잡고 동생 들쳐업고 쫄래쫄래 따라가서 먹던 순 100% 자연산 새참,
뽕나무와 잠실(蠶室), 그리고 한방을 다 차지하고 뽕잎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던 어린나이에 징그럽게 느껴지던 누에들도...
방에 주렁주렁 메달린 메주들도...
캐서 그냥 그 자리에서 먹으면 세상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게 맛있던 당근과 찐보라색 가지들도...
비오면 또로록 물방울이 흘러내려 꺾어서 우산처럼 쓰고 다녔던 토란대도....
모두 다 내 친구들이며 삶이었다.
가을이 오면 황금물결 넘실대는 들판에서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논에 품앗이하며 가을걷이를 했고, 아직 초가를 이고 남아있던 몇몇 집들의 지붕에서는 조롱박들이 익어갔다. 한여름 땡볕을 듬뿍담고 익어가던 고추가 빨래줄에 앉아 얼굴을 비비던 고추잠자리 꼬리만큼 빨개지면 고추를 따서 말리기 위해 집집마다 마당에 멍석을 깔았고, 큰 찻길을 따라 길게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활짝펴서 가을 바람에 한들거리면 사람들은 겨울채비를 서둘렀다. 늦가을 코스모스 꽃잎이 갈색으로 변하고 씨앗이 검게 여물어갈 때 즈음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채근해서 씨앗을 받아오라고 숙제를 내주었고, 동네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씨앗을 모아 학교로 가져갔다.
가을걷이후 벼 밑동만 남아있는 논에 눈이 내리고 남아 있던 물이 얼어붙어 빙판이 되면 우리들은 하나둘씩 아버지나 삼촌을 졸라 썰매를 만들어서 논으로 모여들었다. 어디나 그렇지만 특히 겨울은 농한기 농촌에게 시련의 계절이지만 아이들에게 눈내린 자연은 더없이 커다란 놀이터였다.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끝을 불로 검게 그을려 살짝 구부려서 만들었던 스키도 타고, 창고에 쌓여있던 비료포대를 들고 눈이 소복히 쌓인 옆산 비탈을 올라가 눈썰매를 탔다.
이런 동토가 풀리면서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하면 자연은 어느새 그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들녘 논두렁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형형색색 옷을 갈아입고 피어나고 저 먼발치 산 중턱은 개나리며 진달래, 철쭉으로 색동옷을 입는다.
그 중에서도 눈의 어지러움보다 냄새로 봄을 알려오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카시아 꽃향기....
아카시아 꽃은 특별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아이들에게 한움큼씩 쥐고 꽉꽉 눌러서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는 더없는 간식거리였고 철만난 꿀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의 보고였다.
잊어버렸던 기억....
사람의 기억의 놀라움이란 이런 것일까?
그 아카시아 향을 맡아본지가 십 수년을 헤아려 가지만 어제 우연히 테니스를 치면서 맡았던 그 아카시아 향이 이 모든 것을 단 시간에 다시 내 머리 속에서 일깨워줬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그런거 같다.
평소에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다가
고구마 줄기를 당기면 차례로 고구마들이 뽑혀 나오듯이 뭔가 생각의 가지가 잡히면 연상의 나래를 펼친다.
일상에 치이고 지친 하루하루지만
그리고 특별한 자각없이 지내온 나날들이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문득 연상의 가지 하나가 당겨져 내 생각의 불꽃놀이를 일으킨다.
우리나라에서 '아카시아' 나무라고 불리는 것은 원래 '아까시' 나무가 맞는 이름이고, 아카시아와 아까시는 서로 다른 나무이다. 이 글에서는 그냥 원래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아카시아라고 썼다. 아카시아라는 어감이 난 그냥 좋다.
다른 날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는데 플로리다에서 대학원 때 친구들과 테니스 치다가 이 날은 이상하게 내가 느끼기에 아까시 향을 맡았다. 그것도 진하게. 그런데 그 테니스장 근처에 아까시 나무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향기가 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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