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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Dec 21. 2020

쓰는 일에 대한 나의 사랑

슬픔이나 우울이 많이 쌓인 날, 두려워서 그 두려움 말고는 아무 생각도 못하겠는 새벽, 기분이 좋아 어느 누구에게라도 이 기분을 전하고 싶을 때 나는 글을 쓴다.

왜냐면 글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근래 들어 가장 잘한 일은 아무래도 글쓰기를 시작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글쓰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2019년 초 여름, 좀 센 고비가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에 지친, 새벽이었다. 졸업한 후로 집에만 있는 날들이 계속되고 우는 밤들이 많아졌다. 여지없이 눈물을 쏟은 그날 밤, 다른 날보다 더 길게 울었고, 다른 날과는 다르게 연기를 잘하고 싶다가 아니라, 일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거세게 나를 뒤흔들었다. 그런데 다 울고 나니 울음이 순기능을 한 것인지 속이 정말 후련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았다.

노트북을 열어 키보드를 부서질 듯 두들기며, 부진했던 근 몇 년간에 대한 감정과, 끝내는 지치고 말았다는 패배자의 글을 적다 보니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방향을 틀어 다짐의 글을 적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눈치만 보고, 어떻게 평가받을까에 매몰되고, 자꾸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나의 무능을 되새김질하고 있지 않나. 그만두더라도 하고 싶은 시도들을 제대로 해보고 끝내야 하지 않겠나. 그 폭주하는 에너지가 갑자기 엉뚱하게 글로 불똥이 튀었다.

그래 글도 좀 적어보자, 그리고 그걸 올려보자.


글과 나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고 할 수 있는데, 초등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을 많이 탔다. 금상, 은상은 못 타고 꼭 장려상이었다. 그렇지만 무엇 하나 특출 난 것 없던, 상 받을 일이 전무했던 내가 유일하게 '인정'을 받은 매개가 '글'이었다. 근데 재밌어서 쓴 게 아니라, 숙제인 줄 알고 계속 쓴 것이었는데, 늘 제출한 아이들이 별로 없었던 걸 생각해보면, 숙제라고 착각하고 계속 썼던 것 같다.

그때의 글쓰기는 죽 노동이었다. 원고지에 연필로 적어야 했는데, 연필을 다르게 집는 나는 네 번째 손가락 두 번째 마디가 눌려서 너무 아팠다. 늘 정해진 분량이 있었는데 초등학생한테는 너무 가혹한 분량이었다. 적다가 막힐 때마다 제출하지 못할 것에 지레 겁에 질려 엄마에게 계속 졸라댔었다. 엄마 제발, 엄마 나 못쓰겠어, 엄마 이 다음만 알려줘.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연기 말고 글을 써보는 게 어때?

라는 말을 들었다. 그 똑같은 문장을 대학에 와서까지 듣게 되자, 그 말이 곧 연기에는 소질이 없다는 뜻인 것만 같아서 오기로라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어쩌면 그 과대평가가 계속되길 바래서 쓰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한 바탕 울고 난 그날 밤 이후, 쓰고 싶었던 글들을 닥치는 대로 적었다. 흥분되고, 기뻤다.

글을 업로드하는 시간은 거의 새벽녘이었다. 보통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새벽에 글을 쓰니까. 두근대는 마음으로 올리고 잠자리에 들 때면, 심장이 쿵쿵 뛰고, 조회수가 많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감동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순식간에, 아- 이제라도 지울까, 누군가 이 글을 보고 나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지질함과 우울함, 슬픔의 냄새를 맡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티 나지 않게 나를 피하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으로 이어졌고, 아침이 돼 눈을 떴을 때 그래, 지우자 하고 생각한 적도 많다.

그럼에도 삭제하지 않고 버틴 건 어쩌면 그동안 축적된 억울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웃을 그 이름 모를 누군가를 생각하느라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억울함. 존재하지도 않는 비웃음으로 스스로를 누르던 미성숙함에 대한 후회.


계속해서 쓰고 또 쓰고 한 것은 연기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놀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이다. 일을 쉰 지 오래되고, 일이 잡혀 있지도 않고, 그래서 하루 종일 연기 ‘생각’ 이라도 하고 있어야지, 대사라도 읊조리고 있어야지 하는 압박을 느꼈지만 그런 마음으로 하는 연습은 재미가 없었다. 또, 그전에 별 볼일 없는 연기를 해서 오늘도 나의 전화기는 울리지 않는구나,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때는 내가 다시 전화가 올 수 있게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자학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글을 쓰면, 1차원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고, 내가 쓴 글을 계속 보고 있고. 그리고 써야 하니까 다른 생각들은 저절로 잊혀지고. 글을 쓰는 동안에는 계속 내 안에 있는 것들이 흘러나오는 거니까, 꼭 연기를 통하지 않아도- 다른 것들을 통해 흘러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나면, 나쁜 생각에 소진될 에너지가 별로 없어진다.


글을 쓰며 배운 게 하나 있다. 이렇게 취미로 글을 쓴다고 해도,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고, 그게 심한 날이 있다. 그런 욕구가 심하게 올라온 어느 날, 너무나 잘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문장이 화려하진 않아도 섬세하고, 날카롭지 않게 솔직한 글. 갑자기 욕심이 올라와 쓰고 있던 글과 그 글을 비교하며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다시 쓰고, 그렇게 쓴 글을 봤는데. 내 마음이 담긴 글 같지 않았다.

아- 연기도 어쩌면 똑같지 않을까. 결국엔 네가 하는 연기와 내가 하는 연기가 다를 수밖에 없고, 네가 더 잘하나 내가 더 매력있냐 재봤자, 나는 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별 수 없는 나인데, 비교하고 저울질하는 것 자체가 나로서 할 수 있는 연기를 못하게 하는 거구나, 글 쓰는 일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눈 돌리지 말고 나만 봐야 하는 거구나, 내가 나로 있는 게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잘하는 일인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이 갇혀 울고 있을 때, 나올 수 있게 해 준 글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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