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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미수 Apr 02. 2024

1대 1 팬사인회

 웅성거리는 소리에 대기실로 나갔다. 건강검진을 위해 신체계측을 하고 계신 분이 눈에 들어왔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지만 연예인이라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분명 연예인인데, 이름이 뭐더라?'

시행 중인 검사가 끝나면 나에게 흉부촬영을 하러 올 차례였다. 이름을 알아내 알은체를 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름을 생각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연예인 A의 차트가 내 손에 들어왔다.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호명하고 촬영실로 안내했다. 본명이 예명과 비슷했지만 당황해 캐치하지 못했다.


촬영은 1분 만에 끝이 났다. 촬영이 끝나고 알은체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찰나 A는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손잡이를 돌리려는 A에게 다급하게 말을 건넸다.

"혹시 연예인 아니세요? 성함이....."

이름을 끝맺지 못하고 머뭇머뭇했다.

"B그룹의 A입니다."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나오는 거처럼 자연스럽게 본인 소개를 했다.

"네, 팬이에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은 팬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팬인데 이름을 몰랐다니, 이게 말이야 방귀야.

"혹시 사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름을 기억 못 한 것도 미안한데 사인이라니. 평상시와 다른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네, 그럼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리 올 걸 알고 준비한 것처럼 빠르게 A4용지와 펜을 내어 드렸다.

"감사합니다, A님 안녕히 가세요."

이름도 몰랐던 팬에게 2세대 아이돌 그룹 멤버 A는 사인을 해주고 끝까지 친절함을 유지하며 촬영실을 나갔다. 언제 시작한 지 알 수 없는 1대 1 팬사인회가 그렇게 끝이 났다.

     

 촬영실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목적으로 사용하면 안 되지만, 이 공간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고 평상시와 다른 나의 모습이 발현될 수 있었다.

내향형이면서 내성적이기까지 한 내가 팬과 종이를 연예인에게 내미는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나와 그의 일대일 공간이었기에 가능했다. 거듭된 연습의 힘인지, 이제는 야구장 같은 오픈된 공간에서 '파이팅'을 외치는 경지에 올랐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다른 직업에 비해 방사선사는 환자를 일대일로 응대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나 어르신의 경우 보호자가 함께 오기도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힘드신 경우가 아니면 촬영실에서 나와 일대일 만남이 이뤄진다. 촬영실에서 촬영에 필요한 개인정보 확인, 의상이나 액세서리 확인 그리고 촬영 자세와 호흡에 대한 설명 외에 대화를 할 일은 거의 없다. 방사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촬영실에 오래 머무는 거 자체를 꺼려하셔서 가능하면 신속하게 마쳐드리려고 한다.

     

 촬영실에 들어오자마자 방사선 촬영에 관한 컴플레인을 하시는 분이 가끔 있다.

'이 촬영은 왜 해요?', '또 촬영해야 해요?', '얼마 전에 다른 병원에서 엑스레에 촬영했는데 또 해도 돼요?'

의사 선생님께 해야 할 질문들을 나에게 묻곤 한다. 내가 말씀드릴 수도 있지만 의사 선생님과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어 섣불리 얘기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오픈된 공간이었다면 주변의 시선과 소음 때문에 응대가 쉽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조용한 공간에서 응대할 수 있어 일대일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런 컴플레인을 받을 때면 방사선사가 오픈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응대하는 일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지심리학자로 유명한 김경일 교수님도 내향형이라고 한다. 교수를 하게 된 이유가 그 직업을 가졌을 때 바로 자신의 단독방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했다. 선배들이 대기업에 들어가 자신의 방을 갖기 위해선 20년 이상 근무해 임원이 되어야 가능한 것을 보고 자신의 방을 갖기 위해 교수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말에 교수님의 친구들처럼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이내 교수님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내향인에게 자신만의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내가 방사선사가 된 이유가 교수님과는 다른 이유이지만, 나에게도 교수님처럼 나의 방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루의 3분의 1을 머무는 촬영실은 방사선 장비와 방사선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서늘함과 공포스러움이 상존하는 곳이다. 하지만 내향형인 나에겐 다른 의미의 장소다. 나를 불필요한 접촉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가끔은 일대일 팬사인회도 열리는 촬영실이 나에겐 아늑한 충전의 장소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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