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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Jan 03. 2022

[우주는 네 살] ep.47_한글 쓰기



나는 글을 꽤 빨리 깨쳤다. 

놀 거리가 없는 아이들이 내내 책만 붙들고 놀다가 혼자 글자를 깨쳐버리는, 그런 케이스였던 거다. 30개월에 읽기 시작해 36개월이 되었을 땐 어지간한 맞춤법 따위 틀리지도 않게 쓰는 수준이 되어 나는 동네방네 소문난 영재 아가였다. (심윤경 소설가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 나오는 동구의 여동생 영주가 그런 케이스인데, 그 소설 속에서도 온 동네 사람들이 동구네 집으로 몰려와 영주를 구경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엄마는 그런 나를 누가 훔쳐갈까 봐 애면글면 했다지만 지금 와 내가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도 자랑깨나 하고 살았다. 손님들만 오면 나를 아빠 무릎에다 앉혀두고 공연히 신문이나 잡지 등등을 읽어보게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조카들이 커가는 동안 내내 빈정거렸다. 

구몬 선생님이 맨날 집을 들락거려도 "어쩌면 니네 애들은 아직도 이름을 못 쓰니?" 조카가 학교에 들어가 받아쓰기 백점을 처음 받아왔을 때도 "아이고, 이 백점짜리 한 장에 그동안 돈을 얼마나 들인 거냐?" 요따위로 말을 하다가 싸가지 없는 이모라고 욕을 처먹곤 했다.     


우주를 키우면서 그래서 겁을 좀 먹었다.

이제 나는 가족들에게 얼마나 비웃음을 당할 것인가. 실제로 엄마는 나에게 종종 말했다. 


“그래, 이제 니도 새끼 키우지? 함 보자. 니 새끼 얼마나 똑똑한지 함 보자!” 


그렇게 으르렁거렸다.     


우주는 책을 두 가지 용도로만 사용한다. 지진놀이와 볼링놀이.


“엄마, 지진이 나면 이렇게 책을 머리에 쓰고 피난을 가야 해.” 라거나, “엄마, 빨리 책 세워. 내가 공으로 쓰러뜨리게.” 이런 거다. 책을 들여다보다가 저절로 글자를 깨치게 되는 일은 죽어도 없을 거였다.


그래도 내 딸인데, 작가 딸인데, 어느 날 문득 글자를 줄줄 읽어내리지 않을까, 네 살을 넘기기 전에 좀 읽고 좀 쓰고 그러지 않을까, 나는 기대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우주는 네 살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12월 31일 밤, 제 이름을 쓰겠다며 ‘이’ 한 글자를 썼다. 나는 그 동영상을 가족 단톡방에 올리며 꺼이꺼이 감동을 했다.


“엄마! 봐! 얜 네 살에 글씨를 쓴 거야! 분명 네 살에 쓴 거야!”


하지만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이’가 아니고 0이랑 1을 그냥 쓴 거 같은데?”


나는 아니라고, 우주는 분명 “이-” 라고 말을 하며 썼으니 이건 0이랑 1이 아니고 글자 ‘이’라고, 끝없이 우겨댔지만 가족 모두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분하고 억울했으나 동영상을 본 후배들도 이렇게 의견을 내놓았다.     

후배1     애기 이름이 변종관이나 곽희륜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후배2     얘가 지금 이진법을 쓰는 건 아닐까, 언니?     


나는 몹시 비통했다. 우주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이후 며칠간 제 이름을 열심히 노트에 써댔는데 주로 이러했다.


“엄마, 이우주 써볼게!”


노트에는 이렇게 쓰였다.


‘이ㅣㅇ 이’ 혹은 ‘이 ㅇㅇㅣㅣㅇ’


그런 며칠이 이어지다보니 후배2의 의견에 내 마음도 기울어졌다. 

정말 이진법인가. 011001 혹은 0100110 인가.     


그러다 얼마 전부터 ‘우’가 가능해졌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글자의 증거라고 다시 단톡방에 내놓았지만 역시나 가족들의 맹비난이 이어졌다. 그냥 비뚤게 쓴 0과 1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분하고 분했다.     


하지만 나는 기억해줄 것이다. 끝까지 우겨줄 것이다. 이틀만 있으면 우주는 40개월이 된다. 그러니 우주는 39개월에 제 이름을 (다는 못 썼지만) 쓴 것이고, 비록 숫자 4가 어렵다고 울기는 했으나 3까지는 썼다고. 나중에 우주에게 꼭 말해줄 것이다. 가족들과 후배들이 우주 앞에서 이진법 운운한다면 그 입을 강제로 틀어막고서라도 나는 우주의 훗날 역사를 증언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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