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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Jan 03. 2022

[우주는 일곱 살] ep.83_책벌레



나의 일곱살은 정말이지 책벌레 인생이었는데, 다락방에서 책 읽고, 엄마 몰래 한 권에 50원짜리 만화책 빌리다 쥐어박히고, 읽은 책 읽고 또 읽느라 친구들이랑 소꿉놀이나 흙장난 따위는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우주는 왜 안 그럴까. 그런 내 어린 날 이야기를 우주에게 해주면 "난 책 별론데?" 그러고 마는 우주가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우주는 나 자랄 때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어서, 궁금한 게 생기면 조막만 한 손가락을 움직여 유튜브에 검색하는 우주를 보면 기가 막히기도 했다. (하물며 네이버 검색도 아니고 유튜브 검색이다)


그런데 드디어 우주가 책에 빠져버렸는데, 학습만화다. 

밤 열 시가 다 되어 책을 잡았는데 그날 새벽 한 시가 넘도록 코를 처박고 책을 봤다. 너무너무 재밌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게 귀여워 굳이 자라고도 안 했다. 그래, 재미 붙였을 때 실컷 봐라, 그런 마음이었다.


하도 코를 박고 보길래,     


나: 우주야. 너 그러다 책 속으로 머리가 들어가겠어.

우주: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너 점점점점 책으로 들어가고 있어. 그러다 머리가 책 속으로 빠져버리겠어.     


우주는 까르르 웃었다.      


우주: 살면서 그런 소린 처음 들어봐.     


그래.... 넌 앞으로 살면서 처음 듣는 소리 엄청 많을 거야...... 너무 늦은 시간이라 결국 침대로 데리고 갔는데, 제가 읽은 책 이야기를 내게 해주느라 우리는 그날 두 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우주가 없었다. 나가보니 소파 아래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아, 내 딸 맞아. 그 풍경이 너무 귀엽고 예뻐 얼른 아침을 짓기 시작했다.      


나: 아침에 눈 떴는데, 우주가 엄마 옆에 없었던 건 처음이야.

우주: 어쩔 수 없었어. 뒷 얘기가 너무 궁금해서 빨리 보고 싶었어.     


곁에 가보니 120페이지를 읽고 있다. 만화라고는 해도 맞춤법에 관련된 학습만화라 어려울 만도 한데 그걸 하나하나 읽고 있다. 따뜻한 밥을 푸고 있는데 혼자 키득키득 한다.      


나: 어떤 내용이길래 웃어?

우주: 얘가 그랬어.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하하". 진짜 웃겨.

나: 그게 무슨 말인 줄 알겠어?

우주: 해가 서쪽에서 뜬다잖아. 말도 안 돼.

나: 우주는 해가 어느 쪽에서 뜨는지 알아?

우주: 동쪽에서 뜨겠지, 뭐.

나: 그걸 어떻게 알아? 원래 알고 있었어?

우주: 몰랐는데, 얘가 그러잖아.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고. 그러면서 웃잖아. 하하, 하고. 그러니까 서쪽에서 해가 안 뜬다는 말이겠지. 서쪽에서 안 뜨면 동쪽일 거고.

나: 북쪽도 있고 남쪽도 있는데 왜 하필 동쪽이라 생각해?

우주: 서쪽이랑 짝수인 건 동쪽이잖아.     


우주는 '짝수'를 아마 '짝꿍'으로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홀수는 짝이 없고, 짝수는 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다.     


우주: 엄마, 사실은 나.... 엄마 잘 때 조용히 나와서 책 봤다?

나: 뭐라고? 새벽에?

우주: 응. 너무 궁금해서 잘 수가 없었어. 그래서 불 켜고 거실에서 책 봤어. 그러다가 엄마가 보고 싶어서 나중에 들어갔어.     


응, 너 내 딸 맞구나. 내 유전자 너한테 갔구나.      


결국 우주는 아침도 먹기 전에 코피가 터지고 말았다. 생애 처음 코피였다. 책 읽다가 훅 터진 코피를 닦아주며 나는 몇 번이나 물었다.     


나: 너 진짜 코 판 거 아니야?

우주: 아니라니까. 내가 일곱 살인데 어떻게 코를 파?      


만화책에 빠져 정신 못 차리다 코피 터진 딸을 보며 나는 안타깝기는커녕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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