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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Sep 05. 2018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2

"네 말이 힘이 돼, 정말로!"

  늦은 시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람이 선선하다. 이제 가을인가 보다. 이웃 나라에서는 태풍으로 인해 공항이 폐쇄될 정도로 피해가 크다는데 내가 선 이곳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하다. 그래서 조금은 미안한, 일상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


  탁자 위에 뭔가가 있다. 봉투 위 표식을 보자마자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기다리던 편지. 그 아이가 보낸 것이다. 첫 번째 후원 아동은 성인이 되어 올해부터 다른 나라, 다른 아동으로 바뀌었다. 3개월에 한 번씩 오가는 편지가 생활에 큰 에너지를 주기에 꼬박꼬박 답장을 하고 애써서 편지를 기다린다. 며칠 전, 그동안 미루었던 답장을 쓴 후 '편지를 아직 못 받았나? 소식이 없네.' 조바심이 생기던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보란 듯이 탁자 위에 놓인 편지를 보고 기분이 좋아진다.


  중간 고사 기간, 고입 원서를 쓰기 전 마지막 학기 시험을 준비하는 중3들의 집중도가 달라졌다. 방학 내 축 쳐져있던 아이들이 반짝 반짝 빛이 난다. 자신들도 아는 거지. 이게 마지막 시험이고, 결과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최선을 다해 자신이 목표하는 학교에 가고 싶은 것이다. 그 중 특목고를 가려는 친구가 있다. 방학 동안 숙제를 한 번도 안 해와서 의지 박약에 게으르다고 무심코 못박았는데.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며 필기한 내용을 본인이 다시 정리하여 서류철처럼 들여다본다. 이제야 살아났나 싶어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외고에 가기로 했어?" 라는 질문에 "지금 자소서 쓰고 있어요."라고 짧게 답하는 아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 아이 앞에 자신있게 보여줄 이력이 없는 것 같아 살며시 위축되는 마음. 기분이 찜찜하고 상쾌하지 못하다. '저 나이 때 상위권이었는데 어디서부터 꼬였을까?'부터 '그 때 좀 더 열심히 해둘 걸.' 이제와서 아무 소용없는 후회까지.


  그런 마음으로 집에 왔는데 나를 위로하는 아이의 말이 살아서 움직인다. 기적이 일어났다!


예뻐서 지른, 무민메모보드에 붙인 편지^^

  "아빠가 돌아가셨군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아빠잖아요."

  보지 않고도 내 마음을 읽은 걸까?


  "당신의 편지를 찬찬히 읽어봤어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이제 겨우 사춘기에 접어드는 십대 초반. 그 아이가 내게 마법을 걸어온다. 아니, 기적이다!


  "독서가 취미라구요? 독서는 당신을 더 온전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어떻게 이런 말을 쏟아낼 수 있을까? 짐작으로 그 아이가 사는 곳은 넉넉한 환경이 아닐 텐데. 편지에서 불평 불만은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조심스럽게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읽었을 아이의 모습에 미안해지기까지.


  "아이야, 일상에 지쳐 무뎌지는 마음을 네가 일으키는구나. 일으켜주는구나. 오늘 네가 나를 살렸다. 네 말이 얼마나 큰 힘이, 위로가 되는지."


  




  고마운 마음에 활동 중인 SNS마다 편지를 올렸다. 자랑 삼아, 내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라고. 혼자가 아니라고. 이렇게 내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고 온 마음 다해 기운을 불어넣어준 친구가 먼 곳에 존재한다고. 투명하지 못한 재정 문제로 후원단체에 실망하여 기부까지 그만두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게 이런 친구가 있다고 계속 일러주고 싶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때로 소소한 일들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한 통의 편지 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말이 나를 살렸듯이, 우리들의 언어가 누군가를 일으키고 희망을 건네는 귀한 디딤돌이 되기를! 마법은 결코 멀리 있지 않으니까. 손 끝에, 바라보는 눈빛 속에, 보이지 않는 그 마음 안에 이미 담겨 있으니까.




좋은 말은 입 속에 가두어두면 안 돼, 해야 해.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다른 데 가서 전하게.

좋은 말은 돌림 노래가 되어 떠돌고, 떠돌아야 해.

나쁜 말은 입속에 가두어둬, 소금처럼 녹아 없어질 때까지.


-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증언집,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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