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감이 찾아오다
#1. 도서관 앞마당
"오전 10~12시 사이에 마리몬드 무궁화 텀블러 도착 예정입니다."
버스 한 대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타니 문자가 한 통 와있다. 무궁화 기림일 에디션으로 미리 신청한 텀블러가 오늘 도착할 예정이란다. 마침 도서관 앞마당에 들어서니 환하게 웃고 있는 무궁화. 흰 바탕에 노란 꽃심 둘레로 붉은빛 무늬가 선명하다. 그 모습이 반갑고 청초하여 기념으로 남긴다.
무궁화에 관심을 가진 건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무궁화에 대한 글 때문이다. 누군가는 벌레가 자주 꾀이고 끝이 지저분한 꽃이라고 혹평을 늘어놓았지만 외국 식물관에 화려하게 장식된 꽃을 보며 조목조목 장점을 일러주던 어느 저자. 그의 글 덕분에 그 후로 무궁화를 볼 때마다 천대받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눈길을 한번 더 주게 된다.
#2. 소통의 힘
"부산에서 오셨어요?"
처음 보는 이가 흘깃 쳐다보더니 말을 건넨다.
"아뇨."
왠지 모르게 진실을 말해도 괜찮을 것 같은 직감에 순순히 대답하는 나.
"아는 원장님의 따님과 닮았어요."라고 시작하는 그녀의 이야기. 공교롭게도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바로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말문을 틔운다. 이때 '작가'의 힘을 느낀다! 낯선 이이지만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는 사연이 좋은 글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욕심에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들었다.
알고 보니 자신은 요리를 배우러 가는 길이란다.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유명한 선생님 밑에서 보조를 하며 배우는 과정이라고. 음식과 요리는 다르다면서 우리가 반찬으로 먹는 흔한 음식이 아닌, 하나의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 요리는 놀랍다고 극찬이다. 부잣집 자제들은 시집가기 전 따로 스승을 불러 요리를 전수받는다는 얘기까지 전해준다. 순간 영화 '기생충'의 박사장네가 떠올랐지만, "네."하고 가볍게 응수했다.
아는 이를 닮아서인지 학생이냐, 자신의 요리 덕분에 자식들이 외식을 안한다는 친근한 말까지 아낌없이 쏟아놓는다. 내릴 곳을 놓칠까 귀는 안내방송에 가있고 이런 사람도 다 있네, 신기하고 놀랍고 감사하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니, 자신은 공부에 관심이 없는데 "지혜롭게 잘 가르칠 것 같다."는 칭찬까지 아끼지 않으신다. 내려서 한번 더 그녀를 바라보고는 목례를 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많구나, 내가 들어줘야 할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이 많구나 싶어 괜히 울컥해진다. 마음을 열면 세상 모든 이에게서 배울 게 왜 없으랴.
#3. 비오는 날엔 매운 게 제격이야.
한 달에 두 번 도서관 글씨기 모임, 부동산을 하시는 맏언니 작가님, 어머니와 비슷한 또래라 푸근하면서도 속정 깊은 신속용감한 작가님이 한 말씀 하신다.
"우리, 오늘은 특별한 데 가볼래요?"
싫을 리가 있겠는가. 입맛을 잡는데는 매콤한 게 딱이다. 비도 오니 매운 게 당긴다며, 우리를 어느 낙지집으로 인도하셨다.
매콤한 양념에 혀가 얼얼하지만 콩나물과 순두부를 곁들여 먹으니 술술 잘 넘어간다. 미역을 넣은 오이 냉국은 화끈거리는 혓바닥을 식혀주고 손가락보다 더 굵은 낙지를 가위로 잘라 비벼먹는 맛이 일품이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야외로 자릴 옮겨 후식으로 커피까지 한 잔씩.
평소 자신의 이야기를 꺼리던 어느 작가님께서 다른 도서관에서 자서전 쓰기를 하고 있으면서 '글친'에 대한 고마움을 토로하신다. 본인만이 아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 독자들이 쉽게 읽고 공감할 만한 글을 적어보기로 하셨다면서 다 이 모임 덕분이란다. 글처럼 밖으로 많이 나오신 것 같아 반갑고 소중하다.
"이 곳에 다녀오면 글을 더 쓰고 싶어져요. 작가님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걸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이상하게 그렇다. 다녀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그냥 쓰고 있다. 마음이 움직인다. 그들의 삶이, 먼저 산 역사를 만들어가시는 작가님들의 평범한 이야기가 심장을 두드린다. 비 오는 날 고구마 심으러 가신 작가님, 어젯밤 아들과 친구들이 와서 챙겨준다고 못 오신 작가님, 점심도 못 드시고 다른 수업 들으러 가신 작가님, 일 하기 싫지만 투자한 게 손해나서 일을 해야 한다는 작가님. 사정은 다른데 이상하게 살고 싶게 만든다. 살고 싶어지게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들을 보면서 어머니를, 다른 세대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를 얻어서일까?
#4. 능소화가 피는 계절
어느 집 담벼락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능소화를 보며 지나치기 아쉬워 사진을 찍었다.
옛날 궁궐에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단다. 임금의 눈에 띄어 빈의 자리까지 오른 소화는 날마다 임금을 기다렸지만 야속하게도 임금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 죽은 소화는 임금이 사는 담장 밑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후 이름모를 꽃이 담장을 타고 올라가 담장 안의 임금을 바라보는 모습이 소화를 닮았다고 하여 능소화가 되었단다.
꽃의 전설대로 이 꽃은 담장을 타고 줄기를 뻗어 땅바닥에 꽃을 하나 둘 떨어뜨린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굳은 결심만으로 미련없이 떨어지는 것이라면 속앓이할 필요도 없을 텐데. 전설을 알고 보니 뭔가 모를 처연함과 애절함이 느껴진다.
#5. 내 방
글을 쓰다 생각났다. 오늘 보강이 있다는 것을. 한번씩 이런다. 혼자 흥에 겨워 중요한 약속이나 잡아놓은 수업을 깜빡할 때가 생긴다. 사람에 취해 글 적을 생각만 가득 차서 보강을 깜빡하고 있었던 거다. 다행스럽게도 글을 적는 순간에도 나의 뇌는 작동해서 일과를 떠올려 준다. 오늘은 비가 오는 게 싫지 않다. 원래 우산이란 짐을 더해 들어야 하기에 성가시고 번거로운 날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람 이야기 듣고 낯선 이의 속사정과 꽃구경까지 하니 정작 나의 역사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오늘 글친 작가님들께 총무로서 이런 말씀을 드렸다.
"작가님들이 2019년의 역사입니다. 글 잘 모아두세요. 언젠가 책으로 만들 날 올 겁니다."
그렇다. 살아있는 이들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게 생명을 지닌 이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남에게 보이기 싫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려하던 누군가는 자서전을 준비중이고, 돈을 벌어서 투자에 실패한 어떤 이는 때로 자기 돈을 들여 고객의 요청을 들어주기도 한다. 비가 와야 고구마는 잘 심기고 사람을 만나야 이야깃거리가 충만해진다. 낯선 이에게 마음을 열면 그가 안심하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 저기 숨은 진주처럼 모든 것이 글감이 되고 글쓰기가 된다. 진흙에서 빛나는 진주를 건진 양 기분이 좋아졌다. 이래서 살아있는게 기쁘기도 하다. 물론 모든 순간이 그렇지 못하지만 갈등 속에 꽃이 피어나고 혼돈 속에 진리가 숨어있다.
종일 비가 내릴 모양이다. 컴퓨터를 끄고 수업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 시험을 잘 쳤는지 어땠는지 제자들은 조용하고 아직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삶도 진행중이다. 한 발 나서지 않았으면 몰랐을 인생의 진주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인생. 앞으로도 진주 캐기는 멈추지 않을 신나는 놀이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