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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May 10. 2023

상처를 껴안을 수 있는 힘

 마법빵 대신 문장에서 위안받기

엘니뇨의 영향으로 동남아가 40도가 넘는 폭염에 휩싸인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나라도 올여름, 그렇게 더워지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일교차가 커지고 감기를 너머 독감에 걸린 아이들이 늘어난다. 환경은 갈수록 오염되고 지구도 한계에 다다른 탓이리라. 그러나 나는 당장 밥벌이를 하러 가야 한다.

과외 수업을 하러 가는 길,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벚나무를 유심히 살펴본다. 혹시 기다리는 버찌가 있으려나 싶어서다. 벚꽃이 떨어진 자리에 버찌가 주렁주렁 열리면 보석같이 눈부시다. 물론 그 보석이 떨어진 자리는 새똥이 떨어진 곳 마냥 지저분하고 신발에도 물이 들어 조심해서 걸어야 하지만.

큰 기대 없이 혹시 하고 쳐다본 나무에서 '사랑의 열매'처럼 세 개의 붉은 진주가 반짝인다. 청량하다. 푸른 잎이 싱그럽다. 자연은 언제나 눈부시다. 그래서 자연 속에 거하면 힐링이 된다. 보통 수업 전에는 긴장도가 높아서 배도 불편하고 잔뜩 몸에 힘이 들어가기 일쑤인데, 나무를 보니 설레기까지 하다.


수업을 맡은 아이는 과학고를 준비하는, 꽤 똑똑한 친구이다. 전 과목 '올 에이(all A)'를 받아야 한다. 부모님의 바람일 수 있겠지만, 그 가정에 태어난 이상(헉!) 반항하기 쉽지 않으리라. 유유상종이라고 같이 과학고를 준비하는 친구(과외 학생의 친구)가 이미 지필고사에서 국어가 삐끗했다. 그래서 수행은 만점을 꼭 받아야 해서 독서감상문을 봐주러 가는 길이다. 물론 수업비를 받는다. 무료로 수업을 해줄 만큼 체력이 남아있지 않으니까. 학교에서 여러 권의 책 목록을 주었고 심사 기준도 빡빡하다. 여러 권의 목록 중에 해당 학생은 판타지 경향의 성장 소설, 청소년 문학을 선택했다.

어머니의 당부 때문이겠지만, 노트에 촘촘한 글씨로 적어왔다. 줄거리는 빼곡한데 자신의 적용이 부족하고 같은 패턴의 문장 구조가 읽혀 지적을 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아이들과 학부모님 덕분에 먹고살지만 특목고를 준비하는 빡빡한(?) 가정에서 내가 태어났다면 과연 적응을 했을까 의구심이 자주 든다.


우리 집에도 성장하고 있는, 더욱 성장하길 바라는 '똥강아지'들인 조카가 있기에 선물할 겸, 나도 건질 게 있을 것 같아 책은 미리 주문해 둔 상태였다. 책이 도착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마음이 먹먹하다.

이 소설 속 문장이 마법을 일으키나 보다.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현대인의 행태를 꼬집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새 책처럼 슬며시 읽고 조카에게 건네주려 하던 계획은 벌써 어그러졌다. 형광펜을 잡고 밑줄을 긋고 인덱스 필름을 부치고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다.

소설 속 아이는 어느 순간 든든한 울타리가 부서진다. 완구 회사 영업직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아동 성범죄를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가 충격을 받아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한다. 그 후 아버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온 어느 초등학교 교사와 재혼을 하지만 제 버릇 남주지 못 하고, 의붓딸을 추행하다 아내에게 걸려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간다.


그전에 불편한 관계였던 주인공 소년과 새엄마는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딸의 가해자를 아들로 오해한 새엄마는 정신없이 아들을 두들겨 패고, 그 광경을 어정쩡한 얼굴로 지켜보던 아버지에게 실망한 소년은 '위저드 베이커리'로 숨어든다. 자신의 편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뼈저리게 느낀 소년에게 조력자가 생기는 순간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게 타임 리와인더가 있다면 언제로 돌아갈까?'

예전 같으면 부모님의 결혼식 날로 돌아가 결혼식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게 했을 거라고 대답했을 텐데. 그때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돌아가도 소용이 없으려나. 아무튼 불행한 결혼의 씨앗 자체를 제거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인이 물었던 질문도 연달아 떠올랐다.

"가족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예요. 그래도 이 가정에 다시 태어나겠어요?"라는 질문이었다. 잠시 뜸을 들였지만, 심호흡도 한번 했지만. 대답은 이거였다.

"지금 어머니를 이 가정에서만 만날 수 있다면... 최악의 아버지를 또다시 마주쳐야 한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그 시절은 너무나 괴로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하고 매 순간 지옥은 아니었으므로... 저는 이 가정을 선택했을 거예요."


감사하게도 최악의 아버지가 존재했지만, 그 곁에는 최고의 어머니도 존재했다. 그래서 우울함을 견디고 암흑에서 빛을 간절히 소망하며 살 수 있었다. 물론 트라우마도 생겨 결혼에 대한 회의와 남자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다시 웃을 수 있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힘은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과 나랑 참 많이 다르지만 미워만 할 수 없는 동생, 똥강아지 조카들. 곁에 있는 가족과 더불어 책 속에서 만난 수많은 문장이었다. 내향적이라 그런지 몰라도 외부적인 활동보다는 혼자 침잠해서 속부터 꽉꽉 채워가는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당당해졌다. 무언가 내세울 게 있어서가 아니라 내면의 힘이 책을 통해 만난, 수많은 문장에서 감응하고 가슴으로 절절하게 사무치는 무언가를 느끼면서 시나브로 장착되었다.

술, 담배는 안 하면서 노름에 평생을 지독히도 중독된 한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가난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큰소리치기가 어렵고 밥줄 끊어질까 소심하게 마음 졸이며 살았던 시간들. 말로는 다 풀어놓지 못하는 그 세월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문장의 힘이었고 사람의 힘이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녹아 존재하는 소금처럼 누군가에서 받은 따뜻한 호의와 가슴을 사로잡은 문장들은 거친 세상에서 나를 건져내고 더 당당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도와주었다.


모든 것이 보장된, 안락한 상황이어야만 행복이 깃드는 것이 아니라 힘겨운 과정 속에서 부딪치고 버티고 찢어지는 상처를 참아내면서 끊임없는 결핍을 수용하고 생살을 찢는 상처를 받아들일 때도 새 살은 돋아난다. 아니 상처가 없으면 새 살도 없다. "상처는 새로 돋는 살의 전제 조건"이라는 책 속의 글귀가 내게는 '위저드 베이커리'가 주는 선물이었다. 이렇게 하루가 또 저물어가지만, 오늘도 '작은 행복(petit bonheur)'이 스며들었으니 성공한(?) 인생이다.

살다가 상처를 만나면 기억해 보세요.

"그래, 머지않아 새 살이 차오를 거야! 이 상처를 알뜰살뜰 소독하고 껴안아 주어야지.

나를 더 강하게, 단단하게 만들어줄 마법이 일어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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