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예술작품에 반하다
계획에 없던 염색
두 달에 한 번 꼴로 염색을 한다. 어머니는 듣기 좋은 말로 새치라고 하지만 아니다. 흰머리다. 어쩌겠는가. 세월을 이길 순 없다. 염색을 시작한 건 작년 여름. 지역 인재개발원에 독서모임을 하러 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 머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전에도 이마 위쪽을 시작하여 흰머리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웬만한 피부 질환에 무신경한 나이기에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다. 살짝, 은근히 쳐다보는 아이들의 낌새도 느꼈지만. 복막염과 자궁근종 제거 수술을 동시에 한 경험으로 염색약이 건강에 이로울 리 없겠다 싶어 미루고 미뤄왔다.
그나마 실제 나이보다 조금 동안이기에 버티고 있었는데 흰머리는 버틴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거울 속 머리에 뾰족 올라온 흰머리는 솔직히 보기 싫었다. 미용과 패션에 큰 관심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액세서리나 옷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형편상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 수 없어서 무감각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이 흰머리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 아이들도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 '우리 선생님, 늙었구나.'하고 생각할 게 아닌가. 안 되겠다 싶어 큰마음먹고 어머니와 미용실로 출동. 그나마 염색을 하는 간격을 최대한 2개월로 잡아 두 달에 한 번 연갈색으로 염색을 하고 있다. 본래 머리가 검은 정도가 아니라 새까만 편이라 흰머리는 유독 하얀 자태를 뽐내기 때문에 퍼스널 컬러를 무시한 채 갈색으로 지내고 있다. 머리 윗부분은 드라이와 뚜벅이로 걸어 다니느라 탈색이 되기도 한다. 연예인이나 공인도 아닌데 뭐 어떠니 하며 용감하게 지내는 편이다. 다행인 것은 타인의 시선을 무시할 정도로, 그 부분에서는 강심장이고 고집쟁이라서 스트레스를 덜 받는 성격이라는 것.
거리 위 캔버스. 작자 미상(?)
머리색이 달라지고 수업 시간에 알아보는 아이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고. 다들 말은 안 해도 흰머리보다는 염색한 머리가 부족한 미모를 보조하는지, 그들의 시선으로도 충분히 느껴진다. 그래서 미용실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우리 동네 미용실 사장님의 섬세한 샴푸 솜씨에 반해 꾸준히 가고 있다.
어제 수업을 위해 버스에서 내렸는데 저 광경이 보였다. 내 눈에는 커다란 캔버스에 어느 작가가 물감을 입으로 불어 번지게 만든 효과처럼 보여 급하게 사진을 찍었다. 타고난 예술성이 깊거나 남다른 감각이 있다는 게 아니다. 그냥 저 순간 내 눈에 캔디처럼 달콤하게, 짜릿하게 예술이 스쳐갔다는 거다.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감.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굳이 작가를 밝히자면 나무와 버찌를 떨어지게 한 모든 자연 현상. 십의 섭리하고나 할까. 제목은 '거리 위 캔버스'. 방사능 오염수 방류 문제와 서술형 문제에 지극히 취약한 우리 학원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스트레스 지수가 팍팍 올랐는데. 순간이지만 일상에서 만나는 행복한 시간은 머리를 유연하게 만든다.
지루한 대기 시간, 눈길을 사로잡는 색감
차가 없기에 평소 버스를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버스를 기다리는 대기 시간이 많다. 사실 이 시간이 많이 지루하다. 다니는 곳이 일정하다 보니 보는 풍경이 그 풍경이고. 특별할 것도 별로 없다. 무뎌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은 갑자기 눈에 뭔가가 들어올 때가 있다. 그날 기분이나 건강 상태 등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런 것을 다 떠나 뭔가 빛날 때가 있다. 그러면 사진을 찍는다.
군데군데 낡은 흔적이 보이지만 하얀 담벼락 사이로 인사하듯이 빼꼼 고개를 내미는 새빨간 장미가 재밌어서 사진을 찍었다. 전봇대와 전선, 파란 하늘, 보도블록.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풍경이 저 날 따라 파문을 일으킨다.
"그날이 그날 같다고? 정신 차려! 날 봐. 이렇게 환하게 꽃 피운 거 안 보여. 네 표정은 어떠니?"
이렇게 질책이라도 하듯 쨍하게 피어 있어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당연한 것은 없다. 가끔은 무뎌진 감각을 깨워 일상의 소중함을 일부러 느낄 필요가 있다. 장미가 내게 말을 걸었기에 마음이 답을 했는지도.
자연의 색에 반하다
얼마 전 지인이 농사지은 콩을 주었다며 어머니가 삶아 저녁상에 내놓았다. 여러 가지 콩 중에서도 완두콩을 제일 좋아한다. 작고 여리고 귀엽기 때문에. 딱딱하지 않아 씹기에 큰 불편함도 없고 아기같이 조심스러운 콩이다.
"저는 밥이랑 같이 먹는 게 좋아요."
무심코 한 말에 어머니는 콩밥을 해놓았다. 그녀만의 사랑법이다. 새겨듣고 마음에 심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법. 밥솥을 열다 황송하여 더 자세히 보게 된다.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한 우리 어머니네 손맛과 정성이 느껴진다.
흰 쌀에 검은 쌀과 잡곡을 섞고 '올리브그린'(색상환표에 색상이 엄청 많아 느낌대로 떠올라 검색했더니 이런 단어가 있구나. 들은 적이 있나?)을 띠는 콩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감사하여 소재로 활용. 색상들은 경계 사이 엄청난 그러데이션을 뽐낸다. 특히 자연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상은 인위적으로 흉내내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에 산, 박상은 작가의 <<오늘은 어떤 색 3>>에는 사물을 그리고 사용한 팔레트를 같이 찍어놓았다. 나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면 작업을 했던 과정이 녹아든 팔레트를 기념 삼아 찍었을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보거나 밥이나 반찬을 볼 때도 색에 감탄할 때가 있다. 누군가는 쓸쓸해서 노을이 싫다지만, 노을을 자세히 보면 퍼지는 사이로 색과 색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수많은 그러데이션으로 입혀져 있다. 걷다가 하늘을 보는 순간, 걸음을 멈춘다. 어느 각도에서 찍으면 가장 예쁠지 고민해서 사진에 담는다. 하지만 사진은 실물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한다. 똑같은 주황이 없고 똑같은 초록이 없다. 멸치 볶음에 나오는 꽈리고추와 아삭거리고 덜 매운 오이고추의 색이 다르다. 식물 하나에도 수많은 색이 존재한다. 다 명암이 다르다. 미술 전공도 아니고 지식도 부족하지만 느끼는 바는 이렇다. 얼마나 놀라운지. 신기한지 모른다.
염색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백설공주처럼 영원한 흑발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흰머리는 눈치도 없이 때 되면 알아서 잘도 나타난다. 삭막한 세상, 늘 똑같은 것 같은 일상. 눈을 크게 뜨면 달라 보이는 게 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이고, 오늘과 다를 내일. 하늘, 구름, 나의 피부도 똑같지 않다. 빛나는 무명작가(?)가 내놓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일상 곳곳에 존재한다. 그 자체로 반짝인다. 오늘은 무슨 예술을 발견하게 되려나. 또 발견하지 못하면 어떠한가. 사는 것은 비슷하지만 어떤 의미로 채워나갈지는 우리들의 몫일 테니. 어제보다 더 아름다운 하루를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