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아픈 손가락이어서
동생만 초여름에 태어났고, 어머니와 생전 아버지. 맏이인 나는 다 겨울생이다. 그래서 그런지 동생은 정이 많아 사람들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하다. 어머니와 언니인 나는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원칙주의자이자 조용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생전 아버지는 폭풍 그 자체.
아무튼 조카들과 합류 후 원하든 원치 않든 집안의 가장이 된 나는 예전과 달리 생일상도 거하게(?) 대접받는다. 받으면 또 갚아야 하니, 생일 같은 게 뭔 대수냐며 어머니와 나는 그동안 대충 넘어갔는데, 10월부터 1월까지 조카들, 어머니, 내 생일까지 한 달에 한 번꼴로 케이크와 꽃을 사고 같이 축하를 해야 하니 어느덧 집안 행사가 되어버렸다.
동생이 힘든 일을 당했을 때, 몸 안 아끼고 나선 공로(?)로 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맏이의 생일상을 준비한다. 관절도 약하고 칠순이 지난 어머니는 집안일에도 부쩍 힘겨워하시는데, 그래도 해산물 좋아하는 큰 딸을 위해 새우랑 조개 넣고 미역국 끓이고, 새빨간 딸기도 두 팩이나 사서 딸기 케이크를 만들어놓았다.
"얼른 먹어라. 나중에 없다." 딸기를 한 개라도 더 먹으라고 재촉하는 어머니. 그렇게 말해놓고서는 말과 달리 통에 딸기를 가득 담아 조카들 몫을 따로 챙긴다. 아마 이런 뜻일 거다.
'너는 맛보았으니 이제 됐지? 저 집은 식구가 더 많으니 미리 챙겨줘야 한다.'
음식에 욕심이 없어 딸기가 사라져도 그러려니 한다. 한창 잘 먹어야 되는 성장기 조카들 입에 많이 들어가면 다행이다.
"케이크는 네가 사와라!"
생일을 맞은 당사자는 본인의 카드로 제일 저렴한 케이크를 산다. 사실 그 돈도 조금 아까운데, 촛불 켜고 노래 부르고, 따로 이벤트가 없는 조카들을 위해 후식 삼아 챙기는 것이다.
연말에 중국 여행 다녀온 학원 아이가 어제 수업 오면서 선물을 챙겨준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초콜릿 회사 제품인데, 그동안 자신을 많이 챙겨줬다며 선생님 몫을 안겨준다. 아이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뭉클했다.
'그랬구나. 부족한 샘이어도 작은 것도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같은 교회이기도 해서 혹여 선물 못 받은 다른 선생님이나 아이들은 속상할까 봐 카톡 대문 사진으로 대놓고 올리진 못하고 이곳에는 밝히는...
어릴 때 노란 개나리가 환해서 마음에 들었다. 마침 생일을 맞아 먼 곳에서 보내주신 퐁퐁 국화와 화장품 케이스도 다 노란색. 초콜릿을 담은 종이 가방도 노란색. 올해는 노란색이 희망을 안겨주려나?
이제 겨울 시작인데 벌써 노란 봄이 기다려지니 아직 철이 없긴 하다. 홉스는 자연상태의 인간 존재에 대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말했다지만, 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조카들은 이모의 생일을 맞아 편지를 썼다. 사춘기를 지나고, 사춘기 가운데 있는 아이들이 어느새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첫째 조카는 우리 집 가장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썼다. 그 말을 하기까지 아이가 겪은 혼란과 방황을 알기에 울컥한 나머지 눈물이 나왔다. 자신의 표현대로, 두 번째 조카인 막내 조카는 평소 국어선생님인 이모가 글쓰기와 책 읽기를 강조하는데, 본인이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편지를 써보니 그리 나쁘지도 않다며 자신이 힘들어하는 분야를 가르치는 이모가 멋지다고 아부성 발언을 마구 쏟아놓았다.
꼭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니어도 콩 한쪽 나눠먹으면 다 가족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어릴 때 다녔던 학교와 집 근처를 둘러보고 온 어린 제자는 초콜릿을 챙겨주고, 조카들은 이제 이모의 위치와 자리를 완전히 인식했다. 멀리서 생일을 맞아 마음 써준 벗들과 통 크게 딸기를 샀으나 생일의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세상에 힘들게 나은 사람은 다른 손가락(?)에게 양보를 해도 기분이 좋다.
인간은 모두가 아픈 손가락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점같이 작고 연약하고 눈에 안 띄는 개인일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마음을 쓸 때, 콩 한쪽도 나눠먹을 때 기꺼이 가족이 되는 것이리라. 아직 이 세상에 온기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