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거는 자신뿐"이라는 말의 의미
"좋은 사내 만나면 괜찮게 살고 나쁜 사내 만나면 욕보고 살고 그라는 기라.
어쨌거나 고생을 각오하고 그냥 열심히 일하면 된데이.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 뿐인 기라."
- 이민진, <<파친코 1>> 중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상을 봐두고 나간다. 하트 뿅뿅 엄마표 밥상의 주인공, 어머니는 외출할 때도 상에 먹을 것을 마련해 둔다. 오늘은 삼합 같은 충무 김밥 비슷한 점심상이다.
그녀는 어제 트럭에서 한 바구니에 만 원 하는 커다란 새우를 사서 달큼한 간장 베이스로 새우 조림을 만들었다. 동생이 오일장에서 사 온 어묵으로 따끈한 어묵 볶음과 마트에서 산 일미채 볶음이 한 곳에 담겨있다. 어중간하게 남은 밥은 일일이 조미김에 싸서 입에 넣기 좋게 담아두었다.
예전에는 밥 챙겨 먹는 것도 귀찮았는데, 어느 순간 제 때 식사를 놓치면 배가 끊어질 듯 아프기 때문에 금식도 어렵다. 미식가가 아니기 때문에 식재료에 대한 궁금증이나 평가보다는 어머니가 차려둔 밥상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사진 찍고 상 치우고 글로 남길 뿐이다.
갈색과 고동, 검정과 자주, 살구빛과 주황 등이 섞인 간장 새우 조림에 이어 어제 아침으로 차려준 계란 죽은 연노랑이 따뜻한 느낌을 준다. 한 곳에 기울어진 참깨가 귀엽다. 비려서 생선을 그리 즐기지 못하지만, 구워주신 생선 한 토막은 어머니의 애정이 듬뿍 담긴 보양식이다.
바다 생선이 잘 맞는 금양 체질 딸에게 이웃사촌 횟집 사장님에게서 산 생선 도막을 구워 내놓은 그녀. 이런 사람이 흔치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 매거진이 탄생한 게 아닌가.
우리 어머니 같은 인물이 또 있다. 지금 읽고 있는 <<파친코>>의 양진이 그렇고 선자가 그렇다. 어린 나이에 입술이 갈라지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신랑에게 시집와서 줄줄이 병에 걸린 아기를 여의고 겨우 살아난 딸을 억척스레 키우는 한국의 어머니. 일제 강점기 때 자기 집은 아니지만, 한편에 하숙 쳐서 부지런히 살림을 돌보는 그녀. 이 땅의 어머니다.
미역 파는 아주머니가 양진의 딸 선자에게 하는 말이 위에 인용한 문장이다.
"세상천지에 딱한 여인네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믿을 거는 자신 뿐인 기라."
바닷가에서 작은 게를 잡아 반찬 만들고, 이웃 밭에 가서 품앗이하여 일당 받아 자식들을 먹여 살린 외할머니나 노름꾼 남편으로 빚내어 자식 준비물 마련하고, 예쁜 옷 깨끗하게 입힌 우리 어머니. 작은 몸집으로 다른 나라 가서 부지런히 일하여 자식 결혼시킨 이모도 한국의 어머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진 작가는 한국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류는 정말 대단하지만,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우리의 창작 활동은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광범위한 인간성을 지닌 한국인을 그 자체로 오롯이 인정하는 일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광범위한 인간성을 지닌 한국인"을 오롯이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녀. 한국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작가의 마음이 다가와서 봄바람 같았다.
어느 때는 금계화로 변했다가 어느 때는 해바라기가 되는 어머니 유부초밥. 이러니 딸로서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찍어서 보관하고 기록해야지. 광범위한 인간성을 지닌 그녀를 광범위한 인간성을 지닌 내가 오롯이 인정하기 위해 열심히 쓴다.
단기 선교 다녀온 조카들은 집에 오자 예전의 생활로 돌아간다. 이모로서 학습에 조금 더 매진해 주기를 기대하지만, 잔소리일 뿐 정서적 거리만 멀어질까 눈치만 보고 있다.
책 읽고 글 쓰는 행위는 가벼워 보이기도 하지만, 점 같은 순간이 모여 한 편의 인생 파노라마가 펼쳐진다고 믿기에 멈출 수 없다.
폭우 예고에 강사의 안전을 걱정하는 어느 학부모님이 수업 시간을 변경하자고 하셨다. 혹여 뚜벅이 선생이 수업 오가는 길, 비 맞고 건강이라도 상할까 먼저 염려해 주는 마음. 광범위한 인간성을 지닌 한국인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수업 요일을 변경했더니 이게 무슨 일? 하늘은 잠잠하다. 이렇게 알 수 없는 게 일상의 묘미인지도 모르겠다.
"We are a powerful family", 책에 인쇄된 작가의 사인처럼 우리 식구는 다 다른 에너지로 살아가고 있다. 때로 다투고 은근슬쩍 넘어가기도 하고 웃고 울고 휘몰아치는 에너지로 속도 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조향사, 윤작가는 고난이 와도 미리 겁내지 않고 결국 '원더풀 wonderful'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에너지 조향사 역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런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어머니도 동생도 "좋은 사내"를 만나지 못했으니 결국 "믿을 거는 자신뿐"! 파이팅 외치며 날마다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