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지, 가지 사랑!
"무슨 날이냐고요? 어머니 대신 주방에서 제가 설쳐야 하는 날, 드디어 그날이 왔어요."
어머니가 엊그제 손가락을 자동차 트렁크에 찧는 바람에 오른쪽 손가락 두 개가 붕대에 쌓여있다. 자동이 아닌 수동으로 트렁크를 내리는데, 왼손은 트렁크 잡고 오른손이 다 빠져나오기 전에 순식간에 쾅!
대형사고. 지금까지 어머니는 수술이나 입원을 하신 적이 없다.
맏이를 낳을 때도 병원 아닌 집에서 산파를 불렀기 때문에 병원 문턱에 크게 닿은 적 없이 비교적 건강하게 살아오셨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하셔서 그랬을까? 예기치 않은 사고 발생.
아르바이트하는 장소에서 발생한 사고로 가게 사장님이 어머니 비명 듣고 병원에 데려가서 손가락 하나는 꿰매고 하나는 사태를 지켜보기로 한 모양. 파상풍 주사와 덧나지 말라고 다른 주사까지 총 두 대 맞고 하루 세 번, 소염진통제 포함한 약 처방. 무슨 일인가 싶다.
성냥 머리처럼 붕대가 동그랗게 감겨있는데 흐릿한 핏자국이 보이는 듯하다.
"이거 뚜껑 좀 열어라."
"고추 좀 넣게 잘라라."
"칼, 물에 씻어 양파 좀 까라."
평소에는 시키지도 않던 집안일을 어쭙잖은 보조로 어머니 곁에서 끙끙거렸다. 꾀 내어 고추는 물에 씻어 가위로 듬성듬성 잘라 넣었다. 양파는 물에 한 번 담근 후, 끝부분을 칼로 자르고 대충 벗겨냈다. 다른 때 같으면 딸이 하는 모양새가 답답하여 잔소리하실 텐데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
속으로 진땀 흘리며 어머니 속 타지 않게 빨리 대응하느라 버벅대면서도 임무 완성!
동생네와 합치기 전에는 일 년에 고기를 몇 번 살까 말까, 과일도 먹는 둥 마는 둥 살았다. 조카들이 오니까 이틀 걸러 고기 사고, 과일도 떨어뜨리지 않는다.
자궁근종으로 과일조차 가려먹어야 하는 맏이 위해서 딸이 먹을 수 있는 참외와 청포도, 자두가 담겨있다. 이번에는 붉은 자두라고 색감 화려하고 단 맛 더해진 특이한 과일도 보였다.
어머니는 식구들이 먹기 좋도록 미리 깎아둔다. 식사하고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지금 어머니는 오른쪽 두 손가락 부상으로 물을 조심해야 한다. 식사 준비부터 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과정에 딸 수고가 더해져야 한다. 어머니가 외출한 후, 과일 꺼내 종류별로 참외, 청포도, 붉은 자두를 먹기 좋게 잘라놓는다. 그녀 흉내내기이다.
엉덩이 붙이고 느긋하게 쉬는 적이 거의 없는 어머니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도마 위에 가지를 올려두고 자르기 시작. 프라이팬에 열기가 오르면 잘라둔 가지를 넣고 굽는다. 가지구이이다. 소금을 한 꼬집 넣고 차례대로 뒤집어주면 끝! 이렇게 간편한 요리가 있구나, 목격한 딸은 감탄.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지. 간단하고 몸에 좋은 반찬 한 가지 뚝딱 만들어진다. 사실 가지구이는 치아 교정 중인 첫째 손녀를 위한 그녀의 배려이다. 딱딱한 걸 씹기가 불편한 손녀를 위해 어머니는 지혜를 짜내어 음식을 준비한다.
아프셔도 부모는 부모다. 손가락이 불편해도 요리를 멈추지 못한다. 자신이 아픈 것보다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 다 챙기는 그녀는 타고난 천사인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어머니 삶을 보며 많이 답답했고, 저렇게는 못 산다, 단정한 딸이건만. 어쩌면 나도 식구들 위해 식재료 사서 조금씩 요리하는 노년을 보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다못해 가르치는 제자들이나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 밥 해주고 고기 구워주는 선생으로 늙어가면 좋겠다는 버킷리스트가 있으니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데, 우리 집이 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웃는다. 세상 끝난 듯 우울한 표정으로 살지 않는다. 다행히 손가락이 잘린 것도 아니고, 피는 좀 봤지만 진료받고 약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회복의 순간이 다가올 거라 믿으니까. 세상에는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도 못할 아픔으로 신음하는 영혼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일상에서 누리는 행복조차 죄스럽고 미안할 때가 많다. 하지만 지금 누리는 것들을 충분히 감사하면서 즐기고자 한다. 내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단 하나뿐인 인생이므로.
가지가지,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이 땅. 누군가에게는 페르소나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 누가 어떤 해석을 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일 테고, 지금은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듣는 노래, <나 하나 꽃 피어>의 가사처럼 "나 하나쯤"이 아니라 "나 꽃 피고 너 꽃 피는" 세상을 꿈꾸며 방구석 인생 철학자는 이만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