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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영 May 30. 2018

손해 좀 보면 어때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거든


‘새로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카카오톡 알림이 떴다. 기다리던 메시지다. ‘뭐라고 왔을까?’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보다 꿈틀대는 엄지 손가락을 접으며 생각한다. ‘나중에 봐야지’.  


최근에 알게 된 어떤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시간을 자주 봤다. 성격이 급하기도 하고 회사에는 PC 카톡이 있어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른바 ‘칼답’하는 편이지만, 나도 모르게 메시지가 얼마 만에 왔는지 확인하고 언제 답할지 고민했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상대도 칼답 하지 않으니까. 그가 답을 늦게 한 만큼 나도 늦게 답을 함으로써 말하고 싶었다.


‘흥, 나도 너랑 마찬가지거든’.


  




'손해 본다'는 끔찍한 일  


손해 본다는 생각.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마음으로는 LTE급으로 답을 하고 있는데 계산에 맞추려니 편할 리 없었다. 5분에 한 번씩 시계를 봤고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유치하게 이게 뭐 하는 건가’ 싶다가도 받은 것보다 더 주는 것 같아 싫었다.


우리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모욕감도, 외로움도, 박탈감도 아니다. (중략) 오히려 ‘손해 보는 일’이야말로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다. ‘손해 본다는 느낌’만큼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며 증오와 분노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없다.

그렇게 보면, 자기 이익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가장 성행하는 신앙인 셈이다. 자기 이익은 인간 사이사이에 들어찬 반투과 유리막과 같다. 우리는 좀처럼 그 유리막 너머의 진짜 타자를 만날 수 없다. 아니, 굳이 그 타자를 보려고도, 만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 더 두껍게 유리막을 쌓아 올리면서 ‘자기 이익’에 복무하는 자폐적 상태의 쾌락을 즐긴다. 오직 나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폐적 상태의 쾌락을 즐긴다.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그 속에는 명백하게도 타인에 대한 '실감'이 있었다 중에서



작가 정지우는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에서 ‘손해 본다는 느낌만큼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며 증오와 분노에 휩싸이게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기 이익’은 우리 삶의 대원칙이 되었으며 이는 사소한 인간관계부터 가족, 결혼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며칠 전 생애 최초로 시도한 중고거래가 생각났다. 수완이 좋지 못한 나는 일본 여행에서 잘못 사온 닭살 크림을 능수능란한 구매자에게 홀려 예상보다 저렴한 가격에 팔고 말았다. 어차피 처치 곤란이었고, 애초에 되팔아서 이익을 남기려는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손해를 봤다’는 인식이 뚜렷해질수록 기분이 언짢았다. 손해 보는 일은 나에게도 끔찍한 일이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은 내 삶 곳곳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애썼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마음을 계산하며 나를 다 드러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받은 고마운 마음은 반드시 돌려주고자 했지만, 애초에 돌려줄 마음이 없는 것들은 절대 받지 않았고 내가 손해 보는 게 싫은 만큼 상대가 손해 입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완벽하게 공평한 상황은 없다. 내 마음이 네 마음과 같지 않고, 내 상황과 너의 상황, 가치, 우선순위가 다르니까.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관계하면서 "나도 너에게 손해 입히지 않을 테니 너도 나한테 그 어떤 손해도 주지 마!"라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손해 봐도 '괜찮은' 사람  


가끔 손해를 입어도 타격이 없는 사람을 만난다.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지적을 받아도 발끈하거나 해명하려들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 친구 사이에서 받은 것 또는 받을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 계산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을 보고 있으면 ‘가진 게 많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무언가가 충분히 차 있어서 타인과의 계산에 쉽게 영향을 받지 않는 느낌이다. 가진 게 많으면 조금 더 내놓더라도 타격이 크지 않을 테니까.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그들은 우습거나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조금이라도 손해 보기 싫어서 아득바득 자신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면 아직 채울 게 많은, 그래서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손해를 봐도 괜찮은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다. 없는 거 티 나지 않도록. 아니 그보다 먼저 나를 가득 채워야겠지.


언제 어디서든 손해 보지 않고 자기 몫을 챙기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손해를 봐도 끄떡없는 사람은 근사하고 매력적이다.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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