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생활 반경이 넓어진 까닭일까. 요즘은 걸어 다닐 일이 없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버스를 타고 전철역에 도착하면 바로 열차를 탄다. 내가 집에서 회사를 오갈 때 걷는 시간은 5분 남짓.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역에서 회사까지 걷는 정도다.
돌이켜 보면 어딘가로 걸어서 가는 길에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소한 일상부터 재밌는 이야기,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까지 주제도 다양했다. 한 걸음씩 내디디며 박장대소하는가 하면, 뒤에서 차가 온다고 서로 알려주기도 하고, 계속 걷다가 배가 고프면 간식도 사 먹으면서 걸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도 좋지만,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는 즐거움은 또 다르다.
걷고 싶다. 일부러 길을 찾아서 운동 삼아 걷는 것도 좋지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걸어서 가고 싶다. 그리고 걸어서 가는 길에 함께 어떤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길동무 한 명 있다면 참 좋겠다. 앞으로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지 모르지만, 내 일상에 걷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걸어서 다녔다.
통인동 집을 떠나 삼청동 입구
돈화문 앞을 지나
원남동 로터리를 거쳐
동숭동 캠퍼스까지
그때는 걸어서 다녔다.
전차나 버스를 타지 않고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을 지나
마로니에 그늘이 짙은
문리대 교정까지
먼지나 흙탕물 튀는 길을
천천히 걸어서 다녔다.
요즘처럼 자동차로 달려가면서도
경적을 울려대고
한 발짝 앞서 가려고
안달하지 않았다.
제각기 천천히 걸어서
어딘가 도착할 줄 알았고
때로는 어수룩하게 마냥 기다리기도 했다.
<그때는 걸어서 다녔다> 김광규
걷는 걸 좋아해서일까. 이 시를 좋아한다. 십 년 전에 드라마를 보다 우연히 알았다. ‘걸어서 다녔다’는 화자의 말을 따라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화자가 말하는 곳을 따라 나도 걷는 느낌이 든다.
걸어서 다녔다.
버스를 보내고
낙성대에서 서울대입구역으로
비좁은 시장을 옆에 끼고
고개 위 집까지 걸어서 다녔다.
사람들 어깨에 부딪히고
골목으로 다니는 차에게 길을 비켜주기도 하면서
지루할 틈 없이
그때는 걸어서 다녔다.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다시 큰길
버스와 승용차가 복잡하게 섞여 있는 대로를 지나
오르락내리락
작은 언덕에 솟아 있는 원룸촌을 거쳐
다시 멀미 나는 작은 길
말은 남았는데 길이 모자라
천천히 남은 걸음을 떼면서
걸어서 다녔다.
이 시를 모방해 나의 걷기 역사를 떠올려 보고 싶었다. 걸어서 가는 길이 귀한 요즘, 나에게 걸어서 가는 길이 되어준 동네와 길동무가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