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 말고 연애.
채찍을 저만치 두고 왔으니, '당근'을 찾아야 했다. 어디서 어떻게 당근을 찾아야 하나 막막하다. 명품 백을 턱하니 살 만큼 돈도 없지만 물질적인 보상이 아닌, 진심으로 나의 상처와 회복을 도와줄 '명품 도구'가 필요했다.
잠이 통 오지 않던 새벽이 늘어났다. 알코올 기운 없이 초저녁에 잠이 들면 꼭 새벽 1~2시쯤 잠에서 깨 한 시간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채, 일과를 시작하니 계속되는 피곤함에 연속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밤새 뒤척이다 눈길이 닿은 곳. 당시 나의 책장에는 그동안 1년에 2~3권씩은 서점에 들러 사온 완독하지 못한 책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에 눈이 달렸다면, 나를 원망하는 눈초리랄까.
언제부터였을까? 해바라기처럼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던 녀석들. 짝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듯 언제 바라봐 줄지, 이야기 걸어줄지,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시선들 . 서점에서의 첫 만남엔 썸을 타듯 숨소리마저 설레며 종이 책의 향기에 취해 완독을 꿈꾸며 나의 집에 입장을 허용한다. 첫 장과 프롤로그를 넘어서기 전까지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꽤 당차고 단단하다. 그러나 역시 나는 냄비근성의 소유자답게 쉬이 감정이 식어버린다. 다시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두고, 계획에도 없던 전시를 한다. 그렇게 나의 책은 나에게 읽히길 바라며 기약 없는 외사랑을 하고 있었다.
'과연 이 책만, 이날만 그랬을까?'그렇게 차곡차곡 모아온 책이 수십 권은 족히 넘어 보였다. '무슨 꽃꽂이하듯 책꽂이 했나?'
그랬다. 난 독서가 아니라 그저 책장에 책을 꽂는 '책꽂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책 대신 알코올에 젖고, 알코올은 자기 연민을 부르고, 자기 연민은 자기학대를 끌어와 끊임없는 죄책감과 분노로 나를 채찍질하는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했었다. 나를 치유하고 회복시켜줄, '명품 당근'을 아주 가까이에서 발견한 나는 더 이상 '재수 없는 년'이 아닌 '행운아'였다.
"그래,썸 말고 연애하자.책, 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