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시트콤처럼
어제 백신 3차를 맞고 왔다. 별 이상이 없을 줄 알았건만 저녁부터 주사를 맞은 팔과 겨드랑이가 쿡쿡 쑤셔왔다. 지금도 겨드랑이가 욱신거리는 상태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의 30대의 시작을 함께 열었던 코로나 바이러스는 2년여간의 시간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삶 속에 함께하고 있다. 잠시 잠깐의 유행인 줄 알았건만 이젠 없으면 어색할 것 같은 존재가 되었고 오미크론이라는 변이 바이러스까지 흉흉하게 퍼지고 있다.
Blue
코로나 블루라는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일상생활에 변화가 많이 생겼고 이로 인해 우울감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코로나 때문에 우울한 거겠어 원래 우울했던 거지.’ 코로나가 아니어도 우울할 일이 많기에(연애, 취업, 돈 등등등…) 이 용어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다시 확진자가 늘어나며 실제로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을 토해내는 주변인들을 많이 보았다.
코로나로 우울하든 특정한 상황으로 우울하든 삶에 전반적으로 스며든 블루함을 떨쳐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 요즘이다. 그러다 어제 드라마를 보는데 굉장히 공감되는 장면이 있었다. ‘그 해 우리는’의 여주인공 연수가 할머니에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내가 항상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어… - 그해 우리는 16회 대사 중 -
연수가 할머니에게 대사를 하고 난 후 그녀가 겪었던 힘들고 어려웠던 상황들이 화면에 비춰졌다. 할머니가 입원하신 병원에서 슬퍼하고 있는 연수. 여기까진 어둡고 힘든 그때의 상황 그대로였다. 하지만 카메라가 앵글을 바꾸며 옆을 비추자 곁에서 졸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소 오버스럽게 졸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슬픔의 농도를 희석시켰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는 연수의 착잡한 현실 속에도, 늘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찾아와 수다스럽게 곁에서 떠들어 주는 친구가 있었다. 슬프고 냉담하게만 느껴졌던 순간에도 그녀의 곁에는 늘 그 상황을 희석시키는 존재들이 함께였다.
내 인생 별거 없는 줄 알았는데, 꽤 괜찮은 순간들이 있었어. 내 인생 괴롭힌 건 나 하나였나 봐 - 그해 우리는 16회 대사 중 -
슬프고 어두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면 비극 영화 속 주인공이 되지만 시선을 달리해서 바라보면 우리는 한 편의 시트콤 주인공이 된다. 다시 돌아보면 시퍼렇고 차갑던 순간들을 희석시켜주는 요소들이 군데군데 있었을 것이다.
내 인생을 비극 영화로 만드는 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인생이 비극영화이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의 인생이 슬픈 일도 웃프게 소화해내는 한 편의 시트콤이길 바란다. 때때로 너무 우울한 부분에만 초점을 둘 때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에 우울함을 희석시켜주는 감초 같은 주연들이 늘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조금만 달리 보면 우리 삶은 꽤나 유쾌하고 즐거운 삶이다. 그 유쾌함을 즐기는 주인공이 됐으면 좋겠다.
나에게 하는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