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별 거 아냐
언젠가 한번은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을 맞는다.
스스로에게 가졌던 환상과 꿈들이 깨지는 순간,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진짜가
꿈틀거린다.
전 세계를 여행하리라 꿈꾸면서도 히말라야를 가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히말라야가 내 마음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그런데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으로 나는 히말라야 귀퉁이에 붙은 작은 왕국 ‘라다크’를 마음에 품게 되었다. 그리고 라다크를 정말 우연히, 얼결에 가게 되었다.
2008년. 모 인터넷 신문사에서 1년 정도 인턴으로 일하다 막 끝난 참이었다. 원래 가려고 계획한 유럽 여행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고, 이상하게 자꾸 산이 가고 싶어졌다. 나는 두어 달 쉬면서 매일같이 산을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공고를 하나 보게 되었다. ‘청소년 오지탐사대’를 뽑는 광고였다. 대한산악연맹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으로, 알래스카, 아프리카, 유럽, 히말라야 등 5개 대륙의 오지를 탐험할 대원을 뽑고 있었다. 대상은 만 18~25세의 호기심과 패기, 체력을 갖춘 청소년 50명. 순간 가슴이 엄청 뛰기 시작했다. 장소, 대상, 기준, 경비 그 모든 게 딱 나를 위한 거였다. 이거야, 이거! 나는 당장 오지탐사원이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단 하나 단점은 이 매력적인 조건에 끌린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는 것. 무려 3,300명이 몰렸다. 최종 대원으로 선발되기까지 한 달간 모두 네 차례의 선발 과정을 거치는데, 매번 절반만 살아남는 살벌한 생존게임이었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서바이벌게임에서 살아남았다. 아프리카 르웬조리, 북미 알래스카, 호주 태즈메이니아, 유럽 스칸디나비아, 인도 카라코람 등 5개 대륙 탐사팀이 꾸려졌고, 나는 바람대로 히말라야와 라다크를 탐험하는 ‘인도 카라코람 팀’이 되었다. 두 달간의 준비를 마치고, 20여 일의 일정으로 10명의 팀원들과 마침내 2008년 7월 인도로 출발했다.
“여기는 라닥, 라닥입니다. 탑승하신 승객들은 어여 내려주십시오.”
해서 내렸더니, 고도가 무려 3,500m. 갑자기 숨이 확~ 막혀왔다.
인도 델리를 거쳐, 서울을 출발한 지 만 하루만에 우리 팀은 마침내 라다크의 수도 레에 도착했다. 레 공항에서 나오자 멀리 설산이 보였다. ‘아, 우리가 정말로 히말라야에 오긴 왔구나.’ 싶어 자못 경건해졌다.
“신이시여, 우리를 허락하소서.”
나는 조심스레 라다크에 첫 발을 내디뎠다.
라다크는 과거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던 실크로드였다. 영토상으로는 인도에 속하지만, 언어나 문화, 종교는 티베트와 유사해 ‘작은 티베트’라 불린다. 그래, 산소가 좀 희박하면 어떠랴. 자연이 이렇게나 좋은데. 지화자 좋을시고~!
트레킹 동안 5천 미터 넘게 오를 거라, '고도적응'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고도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부상은 물론이고 자칫 목숨마저 위험할 수 있다. 이틀 간 레에 머물며 고도 적응을 하고 바로 마카밸리로 떠났다. 우리가 할 트레킹은 마카밸리와 잔스칼 산군을 돌아보는 여정으로, 8일간 총 90km를 걷는다.
마카밸리 구간은 고도가 들쭉날쭉한 데다 경사가 완만하게 올라가서 고도 적응에 좋은 코스였다. 게다가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말은 여러 번 듣고 갔는데도, 막상 그랜드캐년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웅장한 풍경을 대하자, 모두 말을 잊었다. 저 멀리 보이는 설산까지, 이 모든 게 히말라야에 와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치 달에 와 있는 것처럼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아아, 여기는 히말라야, 히말라야다, 오버.” 누군가에게 크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히말라야를 걷고 있으니 흙먼지가 날리고 40도에 가까운 건조한 기후 탓에 사막을 걷는 것 같았다. 혹 여기가 화성은 아닐까? 이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친구들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내 평생 이곳을 다시 올 수 있을까?’
라다크는 ‘고갯길이 많은 지역’이란 뜻의 티베트어 ‘라그다스’에서 나왔다는 추측이 있을 정도로 높은 고개들이 많다. 나름 적응 훈련을 한다고 했지만, 고도 5천 미터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다들 고산병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 일부 대원은 “밤새 토하느라 잠을 잔 건지 안 잔 건지 모르겠다”며 고통을 호소해왔다. 고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대원들 대부분이 두통과 구토, 불면증 같은 전형적인 고산 증세를 보였다. 그런데 나는 생각보다 너무 멀쩡했다. 고산병의 '고'자도 경험하지 않았다. 다들 나더러 체력 짱이라며 ‘현지인’이란 별명까지 붙여줬는데, 실은 내게도 말 못할 사정은 있었다.
나는 건강한 신체의 소유자에 무딘 신경으로 사람들이 ‘넌 타고난 여행자’라며 감탄할 정도다. 그런데 단 하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화장실! 나는 조금만 환경이 바뀌어도 화장실을 못 간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친척집에 놀러 가면 내내 화장실을 못 가고 고스란히 변비가 되었다. 여행 좋아하는 내겐 아주 괴로운 부분이었다. 트레킹을 하는 동안 당연하게도 화장실이 없었다. 그건 들판, 길 어느 곳에나 볼일을 봐야 한다는 뜻.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일주일이면 몰라도 20일은 너무 길다.
5일째 되는 날, 내게도 선택의 순간이 왔다. 참고 참았는데 새벽부터 신호가 왔다.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들판으로 나갔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볼일을 보기 위해 가능한 아무도 없는, 방해받지 않을 공간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텐트에서 걸어 5분 거리에서 약간 수풀이 우거진 곳을 찾았다.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눈앞에서 막 해가 솟아오르려는 참이었다. 정면에 스톡 캉그리 (Stok kangri) 산맥이, 등 뒤로 캉 야체 (Kang Yaze) 산이 장엄하게 뻗어 있었고, 하늘은 주황, 보라, 노랑 등 온갖 미묘한 색으로 물들어갔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히말라야의 장엄한 일출. 수만금을 주고도 못 살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황홀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너무너무너무 감동한 나머지, 내가 볼일을 보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그날 나는 들판에서 볼일 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알면서, 아무 데서나 엉덩이를 까고 앉아서 볼일을 보는 인도인들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한번은 누군가 인도의 화장실 문화가 형편없다고 비판하자, 한 인도인이 이렇게 답했다고 하지.
“우린 당신들처럼 성냥갑 안에 숨어 볼일을 보는 대신, 대자연 속에 앉아 바람과 구름을 보며 볼일을 본다. 그게 우리에겐 최고의 명상이다. 그렇게 무엇으로든 자신을 가려야 문명인인가.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혐오하고 인위적인 것을 추종하면서 나무는 더 많이 잘리고 물은 더 오염이 됐다."
-류시화,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중
사실 섹스, 식욕, 배변과 같은 본능들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들인가. 그런데도 우린 그 자연스러운 것들을 문명의 이름으로 얼마나 열심히 가리고 포장하고 있는가. 실은 내가 그렇다. 나는 말끔하고, 고귀한 인간이고 싶었다. 그래서 추하고 못난 부분을 포장하고 가려보려 많이 노력했는데, 이 대자연 속에서는 나를 가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주일 넘게 씻지도 못하고 화장실도 없는 ‘오지’를 다니는 동안, 그토록 숨기려 했던 내 밑바닥을 봐버렸다. 나라는 인간도 결국은 먹고 싸고 놀면서 기본적인 생존 욕구로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걸.
내 안의 동물과 반갑게 조우한 뒤, 나는 많이 편해졌다. 확실히 화장실에 덜 민감해졌고 변비 증상도 거의 없어졌다. 실은 그게 트레킹을 무사히 완주한 것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막상 해보니 그리 힘든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동안 왜 그리 꽁꽁 감춰왔을까. 뭔가 내 한계를 넘어선 기분이다.
하늘과 맞닿아 있어 ‘하늘 정거장’이라고도 불리는 라다크. 똥 누면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