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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리 Jun 09. 2020

일상을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

일상이 여행이 될 수 있다면, #방구석여행기


요새 코로나 때문에 여행을 못가게 되자, 방구석에서 영상, VR, 책 등을 통해 전 세계로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를 '방구석 여행'이라 부르는데, 다른 말로 랜선여행이라고도 한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돈있고 마음먹어도 갈 수 없는 시대가 되어 사람들이 갑갑한 모양이다. #방구석해외여행챌린지 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이벤트도 진행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건 핀란드가 진행하고 있는 '가상헬싱키'. 홈페이지(www.virtualhelsinki.fi)에 접속하면 헬싱키 곳곳을 볼 수 있다. 
'어디갈래챌린지'로 진행되었던 합성짤. 해외여행지에 자신의 사진을 합성해서 올린다 (출처 국민일보) 

그런데 놀랍게도 방구석 여행은 요즘 나온 개념이 아니었다.  책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에 따르면 이미 250년 전에 방구석 여행을 선점한 인간이 따로 있었다.  



내가 바로 방구석 여행 선구자올시다,에헴  


그 주인공은 바로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그는 스물 일곱 살의 프랑스인으로  자신의 침실을 여행한 경험을 글로 풀어  <나의 침실 여행>으로 출간했다. (*우리나라에선 <내 방 여행하는 법>으로 출간됨.)

(알랭드 보통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방 여행’이라는 새로운 여행방식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제공 유유출판사) 

그는 “방에 죽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소개하는 새로운 여행법을 거부할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고 단언하며, 다음과 같은 이들에게 특히 이 방구석 여행을 권한다. 여행을 감히 떠나보지 못하거나, 여행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폭풍이나 강도, 절벽이 무서운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실 1700년~ 1800년대면 아직 교통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 자체가 특별하고 매우 힘든 시대였다. 일단 어디로 떠날라치면 짐을 실어줄 노새도 필요했고, 통역가도 필요했고, 망원경도 필요했고, 거기에 나침반, 총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많은 돈과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방구석 여행에 필요한 건 파자마 한 벌이면 된다. 이게 그 어떤 철학적 이유보다 드 메스트르가 방구석여행을 한 주된 이유라고 본다, 나는. ㅎㅎ 


그의 방구석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머저 문을 잠그고 파자마를 갈아입은 뒤 소파를 텀험한다. 그 전까지 보지 못했던 소파 다리의 우아함에 감탄하고 푹신함에 다시 한번 감탄한 뒤 이번에는 소파에 앉아 침대를 훔쳐보기도 한다. 그러다, 그만 자신의 잡념 사이로 빠져버리는데... 방구석이고 뭐고 개, 애인, 하인, 마른 장미 등을 떠올리며 한참을 헤맨다. (이게 방구석여행의 최대 함정이다!) 그리고 그렇게 방구석 여행을 끝내고 만다. 그가 주로 자기의 생각을 여행한 덕분에,  함께 방구석을 탐험해보고자 책을 펼쳤던 독자들이 그의 잡념과 상념에 빠져버린채 길을 잃고 그대로 책을 덮고 마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1790년 한 장교와 법으로 금지왼 결투를 벌이고 42일간 가택 연금을 선고받았고, 이 책은 가택연금기간 중 자기 방에서 써내려간 기록이라고 한다.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는 마지막 날,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내게 어떤 곳도 가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그들은 내게 이 우주 전체를 남겨놓았다. (중략)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184쪽) 



일상을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


알랭 드 보통은 방구석 여행에서 아래의 통찰을 끌어냈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여행의 기술> 308쪽     


드 보통에 따르면 여행하는 심리는 ‘수용성’에 있다. 겸손한 마음으로, 대상에 새롭게 다가가는 것이다. 아침마다 꽉 막힌 도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지긋지긋한 교통체증일지 몰라도, 여행자에겐 좁은 도로에 꽉찬 자동차를 바라보는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도 우리랑 같네!' 하면서 ㅎㅎ


그렇게 본다면, 방구석 여행과 실제 여행의 차이는 '기대'에 달린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여행을 3년 넘게 했지만, 사실 여행가봐야 크게 벌 거 없다. 대부분은 현지음식을 사먹으며 돌아다닌다거나 뒷골목 보고, 시장구경 하는 식으로 별 거 없다가 가끔 별 일이 한번씩 생긴다. 그게 묘미이긴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재밌는 건 여행중일 때 나는 호기심과 기대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경험을 해도 흥미롭고 새롭다. 누가 말을 걸어와도 새롭고, 미친 사람을 봐도 새롭다.  


하지만 집에 있을 때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 집에서 예측불허한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모든 것은 어제와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어제 본 음식이 들어있을 거고, 베란다를 나가봐도 늘 보던 풍경이 보일 것이다. 방구석이란 그런 존재다. 일상에서 변화가 가장 적은 곳. 그래서 어쩌면 더 안정적인 곳. 



나의 방구석여행기


개인적으론 드 메스트르나 드 보통, 둘다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의 아이디어만큼은 한번 실행해보고픈 생각이 든다. 세상을 탐험하는 대신 내 방을 탐험하는 건 어떤 일이 될까? 여행지에 있을 때처럼 호기심과 기대를 잔뜩 가지고 내 방에 앉아 있는 건, 대체 어떤 경험이 될까? 


아마 나는 옷을 가장 갈아입을 것이다. 집에서는 입지도 않을 '롱 원피스'를 꺼내입을 거고, 여행지에서만 착용했던 화려한 귀걸이와 번쩍거리는 팔찌를 끼고 모자도 한번 써볼것을 고려하고 있다. 그리고 내 방을 한 번 쭈욱 훑어볼 것이다. 그러다 한 귀퉁이에 붙어있는 전지만한 세계지도를 찬찬히 본 다음,  ‘이거 흥미롭네’ 표정으로 내가 서 있는 안방이 지구에서 어디쯤에 있는지 머릿속으로 그려볼 것이다. 그리고 난생 처음 이런 곳에 온 것처럼,  이곳 주인이 가진 기호를 파악하기 위해 침구도 살펴보고, 책장도 세밀히 볼 것이다.  무슨 책이 있는지, 화장품은 뭘 쓰는지, 옷은 어떤 걸 입는지, 악세사리는 뭘 가지고 있는지 구경하고 서랍도 하나하나 열어볼 거다. (물론 몰래 열어본다)


그런데 드 미스트리가 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갑자기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를 비롯한 나의 주변을 '아주 낯설게 볼 수 있는 시야' 말이다. 한 달에 한번은 이런 기억상실증 놀이를 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아침에 잠을 깼는데,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이 내게 문자를 보낸다. 




그러면 나는 완전히 낯선 곳으로 가서 하룻동안 그 방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거다. 그  방구석에서 나는 뭘 해볼까?  이건 뭔가 갑자기 가능성이 한 줄기 열리는 기분이다. 내가 생각지 못했던 가능성. 


이를 테면 이곳을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려 주인을 깜짝 놀라게 해준다거나,

혹은 반대로 청소를 반짝 반짝 윤이 나도록 해줘서 기분을 아주 좋게 만들어버린다든지,

아니면 포도주와 치즈를 준비해두고 서프라이즈를 해준다거나,

친구를 초대해 파티를 연다거나.. 옥상에서 캠핑을 한다거나...

아니면 종일 무협지를 보며 뒹굴거리기..  뭐 그런게 떠오른다. ㅎㅎ


일상도 새롭게 보면 여행이 될 수 있다.  정황상 올해 안으로 해외여행은 가긴 어려울 것 같으니, 이 방구석 여행의 경지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겠다.  일상을 여행으로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게 여행의 최고봉이 아닐까?  

     

방구석 여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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