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드러내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2001년 2월,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여행할 때였다. 원래는 도보여행으로 출발했다가, 3일만에 발톱이 빠져 자전거로 갈아타고 길을 계속 가던 중이었다. (참조: 35. 남말에 속지 않는 법)
길을 물으려고 어느 작은 시골마을로 들어갔다가, 마을어귀에서 한 할머니를 만났다. 머리가 하얗게 센 꼬부랑 할머니는 자전거 뒤에 배낭을 실은 내 행색을 찬찬히 살피셨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셨다.
"뭐 팔러 댕기는거여?"
"네??" 나는 처음에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지금 뭐 팔.러. 댕기느냐고오." 할머니가 다시 한번 물으셨다.
"네?" 다시 반문하다가, 배낭을 가리키는 할머니 손짓을 보고 뒤늦게 이해했다. 아, 지금 날 보따리 장수로 오해하시고 있으시구나.
"할머니, 저 뭐 팔러 다니는거 아니구요, 지금 자전거 여행하는 거에요. 서울에서 왔고, 부산까지 자전거 타고 가는 거에요."
하지만 할머니는내 말을 믿지 않으셨다. 이 추운 한 겨울에, 그렇게 고생스러운 걸 '그냥' 할리가 없다고 고개를 흔드셨다. 몇번을 설명드렸지만, 할머니는 끝끝내 내가 장사꾼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셨다. 결국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할머니를 탓할 수 만도 없는게, 지난 수백년 동안 여행은 '고생'을 뜻했다. 여행이 오늘날처럼 레저/휴양활동이 된 건 얼마되지 않았다. 과거엔 무역하거나 특정 목적을 위해 이동했지, 즐기기 위해 이동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여행을 뜻하는 단어 'travel'은 노고를 뜻하는 'travail'과 어원이 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순례자, 유목민, 군인, 장사꾼, 그리고 바보들 뿐이었다. 그러니, 할머니를 탓할 수만도 없지, 나는 두손 두발 깨끗이 들고 물러나왔다. 에이, 그나저나 이렇게 된 김에 할머니께 뭐라도 하나 팔아볼 걸.
댄 헐리라는 미국 남자가 있다. 그의 직업은 '60초 소설가'이다. 기자였던 그는 어느날 길거리에서 글을 쓰면 어떨까 하는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미친 척 하고, 타자기 하나 들고 거리로 나선다. 그는 동료 소설가들의빈정거림은 개의치 않았다. 그건 방식의 생소함에서 오는 문제일 뿐이었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조롱당하는 않을까 두려웠다.
"60초 소설, 즉석에서 써드립니다."
그가 이 팻말을 들고 거리를 나서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그 이야기를 1분동안 1편의 이야기로 만들어 선물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본격적으로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1분에 1 편씩, 수 만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모아 <60초 소설>이란 책을 써냈다. 그 중 흑인 오페라 가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프리는 흑인 오페라 가수다. 흑인오페라 가수는 흔치 않기 때문에 그는 우릴 많이 놀라게 한다. 그는 자신을 보면 놀라는 사람들의 모습에 약간은 질렸다. 왜 놀라야 하는 것일까? 흑인은 오페라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단 말인가?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선입견과 편견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듯 하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의하기를 바라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정의하기를 원치 않는다.
60초 소설가로서 나도 똑같은 일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내가 타자기를 갖고 도대체 무엇을하는지 늘 궁금해 한다."당신은 왜 이런 일을 하는거죠? 당신은 작가가 아닌가요? 언젠가 '진짜' 글을 쓰고 싶지 않나요?"이것에 나에게는진짜 글쓰기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문학이라는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뉴욕타임즈, 굿하우스키핑, 피플, 뉴욕, TV가이드 등에 기사를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좋은 일은 거리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한 번에 한 사람씩이런 글을 쓰는 것이다.그러니 제프리, 오해받는 것은 아마도 모든 인간의 운명인 듯 하다. 단지 흑인 만이 아니라, 단지 60초 소설가만이 아니라.
세상의 낡은 규칙을 깨고, 자신의 삶을 분명히 정의하고,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따라 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 오해를 받기 마련이다. 그 일이 쉬울 거라고 말한 이는 지금까지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노력을 참고 지켜보며 박수 보낼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할 것이라고말하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왜 그들이 우리를 이해해야만 하는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정말 지혜로운 여자가 해준 다음 말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의 이해심이 부족한 것을 깊이 이해하라"고.
- <60초 소설> 중 발췌, (댄 헐리 저, 류시화 역, 웅진닷컴 2000)
나도 당시 여행하면서 오해를 많이 받았다. 한 아저씨는 나를 보고 ‘내놓은 자식’이라며 혀를 끌끌 차셨고, 어-떤 아저씨는 가출한 건 아닌지, 의심했다. 또 "지금 뭐하는 거냐. 바보 같은 짓 고만하고 집에나 들어가라."며 호통친 분도 계셨다. 처음엔 그게 상처가 되었는데, 그런 반응을 연거푸 접하다 보니 무덤덤해졌다. 날 보따리 장수로 생각한 할머니처럼, 사람들은 결국 자기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아침, 망고 까먹는데, 껍질은 잘 안까지고, 즙은 사방으로 다 튀고 묻고…. 먹기 참 쉽잖았다. 거참, 힘드네. 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힘들다, 힘들다 입버릇처럼 해왔던게… 말야, 알고보면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면서, 사람들의 인정도 받으려 했거든. 그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나만 먹기도 힘든데, 둘 다 먹으려고 욕심부려서 그렇게 힘들었구나. 젠장할 하나는 포기하고 갔어야 했는데.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대로 봐줘야 한다는 법이 있나? 어차피 누구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돼 있다. 그런데 그걸 내 뜻대로 하려고 만든다? 그거 불가능까진 아니어도, 무지 어렵다는 거 알잖아. 게다가 무지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그냥 어떻게 보든 내버려 둬. 그리고 넌 니가 꼴리는 대로 걍 살아. 이미지 관리 하려고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그러자 웃음이 났고, 맘이 편해졌다.
결국은 누구도 아니고, 내 욕심이 날 힘들게 한 거였다. 그동안 ‘사람들이왜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이해하지 못할까,… 내가 가는 길이 이렇게 옳고 좋은데 말야.’ 뭐 이런 생각을 해왔는데.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날 이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지. 실은 옳고 좋다는 것도 내게만 해당한다는 거지. 하하 졸라. 망고 까먹다 갑자기 그런 깨달음이 왔다.
그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내버려두자. 필요이상으로 좋게보든 나쁘게보든, 난 내 생긴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그 뿐.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딴 생각, 자잘한 생각은 하고 싶지 않거든.
Yo no semañana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일단 오늘만 살아있자. I don't know tomorr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