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사기로 전재산을 잃은 날, 그 바닥이 나를 찾아왔다.
"여긴 어딘가요? 해질녁 풍경이 굉장히 아름답네요!"
어느 날 인스타그램 DM으로 메시지 한 통이 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무시했을 텐데,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게 호기심이 끌었다. 나는 청계천 주변이라, 답변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곧장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대만 국적의 남자라고 했다. 곧 한국에 여행을 올 거라며, 여행 이야기를 시작했다.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터라, 내가 좋아하는 주제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는 처음 보는 나에게 자신의 성장기부터 가족, 사업 이야기까지 거리낌없이 털어놨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상하리만치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간만에 가치관이 맞는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 반가움이 일었다. 그렇게 단 며칠 만에 세상 빠르게 친해졌다.
대화를 나눈 지 3일째 되던 날, 그는 암호화폐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코인투자로 큰 돈을 벌었다며 본인이 소유한 차와 집을 보여주었다. 그는 내가 부자가 되도록 도와주고 싶다며 가볍게 권했다. "소액으로 한번 투자해봐요."
순간 꺼림칙 해졌다. (돌이켜보니, 이게 첫번째 의심이 올라온 순간이었다) SNS를 통한 사기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내가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려는 순간, 그는 말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기는 아니에요. 그래도 망설여진다면, 10만 원 정도만 가볍게 시도해봐요.” 그는 강요하지 않았고 다만 자기 계좌를 보여주며 말했다.
당연히 처음엔 거절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러나 간만에 가치관이 통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좋은 말로 계속 권하자 10만원 정도면 잃어도 괜찮다는 생각도 올라왔다. ‘그래, 10만원 정도면 잃어도 괜찮겠지. 이렇게 좋은 말로 권하는데, 딱 한 번만 해보지 뭐. 아니면 바로 그만두면 되잖아?'
그런데 거짓말처럼 수익이 손쉽게 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이미 코인 투자를 하고 있었던 터라 어떻게 투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권한 투자방식은 완전 달랐다. 나는 이게 또 다른 투자법인가, 하는 생각에 크게 의심을 하지 않았다. 수익 난 돈은 출금도 가능했다. 의심이 점점 사라졌다. 동시에 투자금을 늘리기 시작했다. 2주 동안 나는 내 계좌에서 돈이 실시간으로 불어나는 것을 보면서 투자금액을 계속 늘려갔다. 그렇게 투자금은 2주 만에 1억 4천만원까지 불어났다.
내 명의의 계좌였고, 출금도 가능했기에 그렇게 큰 돈이 들어가도 의심하지 않았다. 잘못돼도 다시 인출하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출금이 막혔다. 암호화폐 사이트 고객센터에 문의하자 “세금 25%를 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다. 뭐라고? 내 돈 빼는데 왠 세금이야? 뭔가가 아주 이상하게 돌아갔다.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급하게 인터넷에 접속해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간 내가 거래했던 암호화폐 사이트는 진짜를 정교하게 복제한 가짜 사이트였고, 내 명의의 계좌도 가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게 거짓이었다. 보기좋게 사기당한 것이다. 그렇게 단 2주 만에, 전 재산이 통째로,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가 당한 사기수법이 알고보니 '돼지도살'로 불리는 금융 사기였다. SNS로 접근해 다양한 수법으로 신뢰를 쌓은 뒤, 투자를 유도한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투자금을 계속 늘리게 한 뒤, 한순간에 돈을 몽땅 가로채 버리는 수법이었다. 돼지를 조금씩 살찌워 통통해지면 도살하는 수법과 비슷하다고 일명 ‘돼지도살'이라 불렸다. 찾아보니 나 말고도 이미 수 많은 피해자가 존재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라, 악몽이었다. 놀란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경찰에 내 사례를 신고접수하고 담당 형사를 만났다. 더 놀랍게도 돌아온 답변은 매우 간단했다.
"해외 사기라 추적도 어렵고, 피해 구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시죠?"
경찰서에 난생 처음으로 진술서를 작성하고 돌아온 날. 나는 여전히 세상이 멀쩡한 것을 보았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완전히 무너졌는데, 여전히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행복하게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 내가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나는 좀비처럼 비틀비틀 멍하게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보기좋게 사기당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갑자기 내 주변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강도의 충격이었다. 메가급 태풍을 혼자 정면으로 맞으면 이런 느낌이 들까?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현실감이 사라진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잘 실감나지 않았다. 내가 전재산을 잃긴 잃었는데, 통장잔고가 텅 빈 것 빼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기를 당한 것부터 모든 게 너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어떤 감정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득 문득 실감하게 됐다.
-1만 원짜리 밥을 계산하면서, ‘내가 이 밥을 14,000번 먹을 돈을 날린 거라고?"
-1천 4백만원으로 세계여행 갔던 게 생각나면서, ‘내가 세계여행을 10번도 넘게 할 수 있는 돈을 잃었네!"
-1년에 120만원 내고 듣던 요가학원을 가는 길, ‘내가 요가를 100년 들을 수 있는 돈을 잃은 거야?”
계산할수록, 숨이 턱턱 막히고 눈이 뒤집혔다. 미친 듯이 화가 났다가, 이내 후회와 자책, 원망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가슴이 통째 뜯겨 나가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이런 고통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끔찍했던 건, 이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 달 동안 법률회사, 경찰서로, 피해자 카페로, 상담센터로 여기 저기 뛰어다녔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결국 지인을 통해 화이트 해커까지 동원해봤지만 범죄자가 홍콩, 덴마크 등 세계 곳곳에 있다는 것만 밝혀냈을 뿐, 그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무 화가 났고, 참담했고, 말할 수 없이 무력했다
경찰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범인은 해외 SNS를 사용한데다, 대포통장이라 추적이 어렵습니다." 라고 발뺌했고, 변호사는 수임료를 제시하기 바빴다. "이 사건은 구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돈만 내시면 소송은 도와드리겠습니다." 돈을 되찾을 희망은 거의 없어보였지만, 그들 말처럼 소송을 해볼까 싶었다. 그 돈을 잃고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잖은가? 그런데 범죄자가 누구인지 특정할수도 없는 상황에서 소송해봐야 얻을 게 거의 없다는 한 변호사의 조언에 깊이 고민했다.
그래, 냉정하게 따져보자. 소송해서 재판에 들어가면 최소 1~2년이 걸린다. 그동안 그는 변호사 수임료도 만만찮다. 못해서 천 만원 이상은 들 것이다. 재판을 하면서 들어갈 내 정신적인 에너지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 애써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범죄자를 잡을 수 있는 가능성도, 내 돈을 돌려받을 가능성도 아주 희박했다. 분통이 터졌다.
더 화가 나는 건, 사기 피해자가 그 시점에도 계속해서 증가하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피해자를 도와주는 곳은 없었다. 지급 정지를 막을 수 있다던 은행도, 수사해 줄 경찰도, 어떤 기관도 피해자 편이 아니었다. 모두 '안된다,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렇다고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1500명 넘는 인간들이 내 카톡 친구로 등록돼 있는데, 그 중 내 말을 기꺼이 들어줄 만한 사람이,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절망감이 가장 먼저 찾아왔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간절히 기도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내면은 무너졌지만 일은 해야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일을 하러가면서 두 달 동안은 거의 매일 울었다. 일터에 도착하면 화장실에서 눈물을 닦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바꾸고 사람들을 만났다.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엄청난 고통을 온 몸을 후벼파는 동안, 정신만은 잃지 않으려 애썼다.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지만, '여기서 정신줄을 잃으면 나는 끝이다!' 틈날 때마다 되뇌며 버텼다.
사기사건이후, 내 세계는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2년간의 지옥이 시작됐다.
누구든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충격적인 일'을 겪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이혼하고, 사업에 실패한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성폭력을 당하고, 학대를 당하기도 한다. 질병으로 죽음 앞까지 가거나 지진, 산불, 수해와 같은 자연재해를 입기도 한다. 전쟁에 휩쓸리기도 한다. 한 번이라도 겪으면 정신에 큰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사건을 '트라우마'라 한다.
트라우마(trauma)는 ‘상처’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로, 이를 겪으면 삶이 크게 휘청이거나 무너질 정도로 큰 영향을 받는다. 전 재산을 사기 당한 일은 내겐 심각한 트라우마였다. 단순한 ‘경제적 손실’이 아니라, 삶의 기반과 신념을 한꺼번에 붕괴되며, 나를 지탱하던 심리적 안전망도 같이 무너져내렸다.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자신을 지탱하던 믿음과 틀, 가치관이 갈갈이 찢기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를 겪으면, ‘착한 사람은 화를 입지 않는다, 부모는 항상 살아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안전하다’와 같은 일상의 확신이 사라진다. 평소 가졌던 믿음을 잃고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많아지면서, 불안, 원망, 분노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알던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자, 더는 이전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게 됐다. 모든 게 무너진 폐허 속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 분노, 울분, 수치심, 증오, 혐오 같은 어둠의 감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왔고, 심장이 통째 뜯겨 나가는 고통이 함께 밀려왔다.
많은 범죄 피해자들이 범죄를 겪은 이후 한 달 가까이 급성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 반복적으로 트라우마 기억이 떠오르며 두려움, 분노, 슬픔, 혐오, 죄책감 등을 계속해서 느낀다. 잠을 못 자거나 악몽을 꾸기도 하고,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감정이 폭발한다.
상실의 5단계라는 게 있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이라는 5단계를 거쳐 반응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실연이든, 투자로 큰 손실을 보았든, 소중한 사람을 잃었든, 장애를 입었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비극적인 손실을 맛본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난다.
나는 그와 비슷한,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어둠의 5단계’를 거쳤다.
처음엔 '믿을 수 없는 부정'의 시간이었고,
그 다음엔 엄청난 '분노'가 밀려왔다.
이후엔 '우울, 울분, 혐오, 증오’가 그 자리를 채웠고,
곧이어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과 ‘울분’이, 인간에 대한 ‘혐오'가 밀려왔다.
이후 적대감과 복수심, 분노와 원망이 합쳐져 강력한 '증오'로 피어났다.
잠자고 있던 어둠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깨어나 마치 이어달리기 하듯 찾아왔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어두웠던, 암흑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