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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라는 몹쓸 것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있을까?

by 김글리


수시로 찾아오는 트라우마 기억들


트라우마를 겪으면 불면, 우울 같은 증상이 발생하는데 50%는 3개월 이내 회복되고, 80~90%는 1~2년 내 회복된다. 하지만 증상이 한달 이상 지속되고, 주관적 고통이 심할 경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TSD)’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크게 4가지 증상이 있다.


사건과 관련된 불쾌한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침습’,

사건을 연상시키는 요소를 피하려고 애쓰는 ‘회피’,

생각과 감정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인지 및 기분 변화’,

몸이 항상 경계상태로 있는 ‘과각성’이다.


나는 특히 침습과 인지 및 기분 변화가 심했다. 사기 당하고 몇 달 동안은 수시로 당시 기억이 떠올랐다. 뉴스에서 '사기'관련 소식을 볼 때, 내 통장잔고를 확인할 때, 누군가에게 입금할 때... 이런 자잘한 순간이 모두 트라우마를 상기시켰다. 어떨 때 지옥같냐면, 내가 적금과 예금해둔 돈을 모조리 빼내서 사기꾼에게 수십차례 입금할 때가 떠오를 때다. 특히 잠들 때, 잠에서 깬 직후엔 기억이 더욱 생생히 찾아왔다. 그럴 때면 견딜 수 없는 비참함과 분노가 심장을 후벼팠다.


나는 7년간 악착같이 모은 전 재산이 2주 만에 사라지는 절망 속에서 매일 지옥같은 나날을 보냈다. 분노, 적개심, 울분, 혐오, 증오가 태풍처럼 휘몰아쳤고, 그 속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부서져갔다.


그렇다고 주변에 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주변에 말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고, 되려 안 좋은 소문이 날 확률 5만 퍼센트였다. 여러 범죄 가운데도 사기와 성폭행은 유독 피해자를 탓하는 경우가 많다. 보이스핑싱예방협회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 90% 이상이 정신적 피해를 호소했는데,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도움을 구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 역시 같은 이유로 주변에 말하지 못했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았다. 마땅히 도움을 구할 곳도, 요청할 곳도 떠오르지 않았다.끝없이 몰려오는 고통 속에서 계속해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있는가?


지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외상후 성장이라는 거 못 믿겠어. 어떻게 트라우마를 겪고 더 나아질 수가 있지? 다 거짓말 같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으니까.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게 진정한 회복이란 건 뭘까?


회복은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다’는 뜻이 있다. 하지만 이는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이전의 삶은 이미 무너졌기 때문에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이들을 ‘깨진 꽃병’으로 비유한다. 충격으로 산산이 조각난 꽃병처럼, 삶이 산산이 부서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끼던 꽃병이 깨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깨진 조각을 붙여 원래대로 복구한다.

둘째, 아깝지만 쓰레기통에 버린다.

셋째, 깨진 조각을 활용해 새로운 작품 만든다.


첫번째 선택은 겉모습은 복원할 수 있지만, 꽃병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작은 충격에도 쉽게 다시 깨진다. 두번째 선택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세번째는 상처와 상실을 받아들이고, 그 조각들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일이다. 이는 재건축과 같다. 기존 건물을 다 밀어버리고 새로 건물을 지어 올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신념, 태도, 가치관이 모두 바뀌기 때문에 말처럼 쉽지 않다. 이미 달라져버린 삶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 트라우마 이후의 여정이자 진정한 회복의 길이기도 하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내려야 하는 결단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결단해야 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일처럼 '잊고' 살 것인지,

분노하고 아파하며 '피해자'로 내내 머물 건지,

고통을 딛고 '전환점'으로 삼아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나는 없었던 일처럼 살고 싶지도 않았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 일을 내 삶을 바꿀 계기로 삼는 것.


하지만 이 선택으로 내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당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부서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믿음이 파괴된 자리에 무엇이 찾아오는지 몰랐다. 어떻게 다시 삶을 쌓아올려야 하는지 몰랐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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