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무너지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 약 264만 명의 장애인이 있단다. 2023년 복지부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그중 88.1%가 후천적 장애인이다. 이는 그들이 평범히 살다 예기치 못한 사건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뉴스에서 날마다 온갖 사건사고 소식을 접하면서도 막연히 ‘나는 괜찮겠지’ 생각하며 살았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사건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리고 보니, ‘나는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알았다. 누구도 불행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이 닥치면, 우리는 원망과 분노에 휩싸여 외친다.
"왜 하필 나야? 다른 사람도 많은 데, 왜 나냐고??"
미국의 유명 만화가 딕 브라운이 그린 두 컷 짜리 만화 <공포의 해이가르>는 이 질문에 좋은 답을 준다. 주인공 해이가르는 바이킹이다. 어느 날 거친 폭풍우를 맞아 배가 좌초되자 해이가르는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왜 하필 나입니까? (Why me?)”
그러자 신이 덤덤하게 되묻는다.
“왜 넌 안 되지? (Why not?)”
조 바이든 미국 전 대통령은 이 만화를 수십 년간 간직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는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9살이던 바이든은 젊은 나이에 미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며 승승장구한다. 그런데 몇 주 뒤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교통사고로 아내와 어린 딸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당시 2살, 3살이던 두 아들 마저 크게 다쳤던 것이다. 그는 끝없이 절망하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나" 고통스러워했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위 만화를 보여줬다는 일설이 있다.
이 만화가 그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큰 고통과 상실을 경험한 후 그는 '난관을 견디고 일어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됐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영영 쓰러진 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나쁜 일이 생기면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걸까? 내가 뭔가 잘못해서일까? 이게 내 업보일까?'
유대교 랍비이자 작가 헤롤드 쿠쉬너 Harold Kushner는 두터운 신앙심을 가진 성직자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아들 아론이 조로증 진단을 받으면서 무너진다. 조로증은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질병으로, 대부분 10대 초반에 사망한다. 쿠쉬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했지만, 아들은 14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들의 죽음은 쿠쉬너의 신앙을 뿌리째 흔들었다. 그는 목회를 포기하려 했지만 수 많은 기도를 통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세상은 불공정하며, 나쁜 일은 선악과 상관없이 무작위로 일어난다.’
삶은 공정하지 않다. 누구는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되고, 누구는 자연재해로 가진 모든 걸 잃는다. 반면 누구는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기도 하고, 꿈꿔온 것을 이루기도 한다.
그는 아들 덕분에 더 많은 공감을 해줄 수 있는 목회자이자 더 능력있는 카운슬러가 되었지만, 아들이 살아만있다면 기꺼이 이 모든 걸 포기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아들의 죽음은 그가 퉁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들은 떠났고, 고통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통을 받아들이고 계속 나아가는 것 뿐이다.
나쁜 일은 무작위로 찾아온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인과응보의 결과로 생각한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적인 사고 때문이다. 내가 한 행동, 말, 생각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는 원리다. 나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부처가 말한 '업보(카르마)' 역시 인과응보 원리다. 업보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도덕적 행동을 장려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이를 잘못 받아들이면 사회적 불의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고통의 책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논리는 매우 위험하다.
그렇다면 '업보'를 강조했던 부처는 이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부처는 모든 걸 업보 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고통의 무작위성을 인정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부처에게 물었다.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모든 걸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는 이들은 업보에 의한 것인가요?” 부처는 이런 답을 내린다.
"모든 고난을 업보에 따른 결과로 보는 건 지나친 것이다.
여덟 개 중에 하나 정도가 업의 결과다."
즉,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대개 아무 이유 없이 온다. 그게 고통의 특징이다.
비극의 특징은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이다. 베토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자기 사랑하는 여인이 죽고, 난청까지 와 귀가 들리지 않자 그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베토벤은 수도원으로 가 도움을 청했다. 수사는 베토벤의 이야기를 듣더니, 유리구슬이 든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에서 구슬 두개를 꺼내세요."
베토벤이 두 번 연속 검은색 구슬을 꺼내자, 수사가 말했다.
"상자에는 모두 열개의 구슬이 있죠. 여덟 개는 검은 색이고, 두 개는 흰색입니다. 검은색은 불행과 고통을, 흰색은 행운과 희망을 의미하죠. 어떤 사람은 흰 구슬을 먼저 뽑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연속으로 검은 구슬을 뽑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아직 구슬이 남아있고 그 속에 분명히 흰 구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행운과 불행은 확률적으로 찾아오며,
행운보다 불행의 수가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불행한 일을 겪는 이유는, 내가 원죄가 있거나 업보 때문이 아니다.
대부분은 그냥 일어난다.
내게만 오는 게 아니라 어쩌다 내게도 오는 일이다.
우연히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사기를 겪고 처음엔 나도 이 일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부주의했고 내가 어리석은 탓이라고.
하지만 작정하고 사기치려고 달려든 사람에게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내게 일어난 나쁜 일이었다.
나쁜 일은 아무 이유 없이도 그냥 일어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내게도 일어났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