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삶을 받아들이는 지혜
마크 엡스타인은 미국 정신과 의사로, 수십년 간 트라우마를 가진 환자들을 상담해왔다. 그는 트라우마보다 더 도움을 주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트라우마가 존재의 밑바닥에 놓인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모든 환상을 깨트리고 진리를 드러낸다. 다만 그 방식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워 정신을 차리지 못할 뿐이다. 그 환상 중 하나는 이 삶이 안전하다는 착각이다.
붓다는 고통을 끝내는 처방전으로 ‘사성제’를 제시했다. 그중에서도 “있는 그대로 보라.”는 여실지견이 핵심이다. 고통에서 도망갈 방법은 없다. 내게 닥친 불행과 공포, 슬픔, 고통을 그대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가끔 카펫의 아래를 의도치 않게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 생긴다.
보이지 않게끔 꾹꾹 밀어넣었던 사실들이 내 의도와 달리 튀어나오는 경우가 생긴다. 원치는 않지만 강제로 현실을 바라봐야할 때가 생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세상과 인간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사람을 '아름답고, 대단하고, 호기심이 이는 존재'로 봤다.
지금은 사람을 '아름답고, 대단하고, 호기심이 이는 존재, 치사하고 비굴하고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좌절하고 한없이 나약한 존재,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고통받고 사는 내내 고통에 휩싸이는 애잔한 존재.'로 본다.
예전에는 인간을 한 단면으로 봤다면 이제는 입체적으로 보인다. 인간의 추악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보인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환상, 기대가 완전히 없어졌다. 이번에 그게 산산히 부숴졌거든. 덕분에 인간을 볼 때 별 감정이 없다. 호기심도, 호감도 없다. 나이가 적든 많든 그냥 하나의 '사회적 동물'로 보인다. 한계 많은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세상이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했어. 이제는 고통으로 가득찬 곳이라고 생각해. 즐거운 것도 있지만 고통이 기본적으로 깔린 곳. 세상도 양면으로 보여. 이전과 달리 입체적으로 보여. 매정하고 냉정한 곳, 고통이 가득한 곳, 하지만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 곳. 그래서 한번 살아볼만한 곳. 세상에 대한 환상도 없어졌다. 그것도 완전히 산산히 부셔졌으니까.
인간, 세상. 모두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다. 환상도 없다. 양면이 존재하니까. 그러니 기대없이, 환상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볼 뿐.
삶이 공정하고 합리적이란 생각은 환상이다. 우리의 바람일 뿐, 삶은 본래 불완전하고 비합리적이다. 때문에 우리는 상처받고, 고통받고, 실패하고, 많은 걸 잃는다. 모건 하우절은 그의 책 <불변의 법칙>에서 재밌는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뭘까?'
그에 따르면, '어떻게 하면 그것을 피할까?'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이 혼란한 세상을 견디면 살아갈까?'다.
영화 <300>의 원작을 쓴 작가 스티브 프레스필드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집세를 아끼려고 정신질환자들이 지내는 시설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정신질환자들이 자신이 만나본 가장 재밌고 흥미로운 인물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엉터리를 꿰뚫어 본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이 엉터리라는 걸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불완전한 세상을 부정할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
이 세상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엉터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는 걸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미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살면서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을 겪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환상이나 착각이 한번은 깨져야 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고.
덕분에 나의 오랜 가치관과 믿음들을 낱낱이 보고 다시 정비할 기회를 얻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