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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적으로 보일 때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면

by 김글리


세상이 적으로 보일 때


사기를 당하고 사람에 대한 감정이 호감에서 적대감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낯선 이를 보거나, 사람이 많은 공간에 가면 나도 모르게 적개심이 올라왔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면 경계부터 했고, 친절을 베풀면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속으로 놀랐다. 사람들에게 누구보다 쉽게 호감을 느끼고, 경계를 두지 않아서 나였는데… '넌 정말 오픈마인드'란 이야기를 들던 나였는데…. 내가 어떻게 된 걸까? 누구와도 쉽게 친절하고 사람들에게 열려있던 나의 마음은 사기 사건 이후 완전히 닫혀 버렸다. '사람들이 언제 또 나를 속이거나, 공격할지 몰라. 조심해야 해.'


실제로 트라우마를 겪으면, 뇌의 편도체는 이전과 달라진다. 편도체는 우리 몸에서 위험을 감지하는 센서이자 비상벨 역할을 한다. 위험을 감지해 몸 전체를 긴장시키고 싸우거나 도망가라는 교감 신경계를 활성화 시킨다. 원래는 실제 위험한 순간에만 반응해야 정상인데, 트라우마 이후에는 편도체가 과활성화돼 별것 아닌 것도 위협으로 분류해버린다. 위협을 판단하는 기준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위협이 없어도 사소한 말투나 표정, 낯선 사람의 시선 하나에도 ‘위험’ 신호를 보낸다. 그와 함께 긴장하고, 불안하고, 화가 치밀고 쉽게 놀라게 된다.


이는 단순한 성격 변화가 아니라, 신경계가 생존을 위해 작동하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한 번 위험을 겪은 뇌는 같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세상을 경계하고, 다시는 속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재설계한다. 그래서 세상이 적으로 보이는 순간은, 사실 뇌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상시 비상모드'를 켜두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을 좀먹는 피해의식


세상이 나의 적이 될 때, 우리는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을 갖게 된다. 피해의식은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피해자로 두는 마음이며, 이에 사로잡히면 세상 전체가 나를 공격하고 있다고 느낀다. 피해의식은 사특히 사람에게 큰 상처를 입을 때 많이 생긴다.


문득 한 친구가 떠올랐다. A는 내가 본 사람 중 피해의식이 가장 심했다. 겉으로는 아주 성실하고 밝았는데, 사람들이 늘 자신에게 해코지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어릴 때 엄마가 집을 나갔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빠와 단 둘이 살았다. A는 보살핌을 받기는 커녕 수시로 아버지의 폭언에 시달리면 생계도 책임져야 했다. 10대때부터 알바를 숱하게 하면서도, 야간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업했지만 그의 피해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A는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면, '내 욕을 하는 건가?' 생각했고, 점심시간에 동료들이 자신을 빼놓고 가면 '나를 왕따시키나?' 오해했다. 퇴근 후에는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곱씹으며 '왜 나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자책하고 분노했다. 그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경계했다. 그가 겪어온 오랜 외로움과 상처가 세상을 그의 '적'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엔 A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젠 완전히 이해가 된다.


피해의식은 한번 자리잡으면 사라지지 않고 갈수록 심해진다. 피해의식이 지속되면, 작은 일에도 쉽게 불안해지거나 우울해지고, 인간 관계는 극도로 피곤해진다. 전엔 이런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호되게 사람에게 당하고 나니, 내가 그렇게 변하더라. 세상 전체가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너무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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