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워지기 위한 선택
시간이 지나도 분노와 억울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의 양상이 바뀌어갔다. 단순한 분노가 아닌, 억울하고, 미칠 듯이 답답하면서도 원망스러운… 그 모든 게 뒤섞인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인지 뭔지 몰라 며칠 동안 심리학 자료를 뒤졌다. 그러다 내 증상과 딱 들어맞는 감정을 찾아냈다. ‘울분’이었다.
울분은 단순하지 않다. 수치심, 복수심, 무기력, 모멸감, 좌절이 얽힌 그야말로 부정적인 감정의 총체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세상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 가치관이 통째로 부정당했을 때, 울분이 강력하게 밀려온다.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한데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깊은 울분에 잠긴다. 딱 나의 상황이었다.
울분에 휩싸이면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 대체 왜?
아무도 내 고통을 몰라. 이런 거지 같은 세상이, 너무 짜증나고 원망스러워.’
거리를 걷는데 사람들이 즐겁게 웃고 있거나, 날씨가 너무 좋아도 울분이 올라왔다.
내 세상은 완전히 무너졌는데 세상이 이렇게 멀쩡하다는 게 견딜 수 없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이따위 세상, 폭삭 망해버려라!!
울분은 그 자체로도 고통이지만, 사회적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울분이 극한으로 치달으면 증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울분이 강하면 복수심에 휩싸여 상대를 파괴하거나, 스스로를 파괴하는 양상으로 이어진다. 울분이 높은 사람들의 60%가 자살을 생각한다는 게 놀랍지 않았다.
울분이 내면을 장악하면서 내 마음은 '폭탄'처럼 변했다. 길에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거나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너무 화가 나서 쫓아가서 해코지하고 싶어졌다. 이런 생각이 올라오면 스스로도 흠칫, 놀랐다. 가급적이면 누구와도 갈등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일 외에 모든 사회활동을 멈추었다. 대신 혼자 시간을 보냈다. 책 보고, 글 쓰고, 운동하고, 영화나 드라마도 많이 보았다. 그렇게 여러 달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과 멀어지고 고립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고립 속에서 나는 인간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하철에 아이 셋을 데리고 한 남자가 탔다. 아이들이 지나칠 정도로 소란스럽게 구는데도 아버지는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또 다른 남자가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좀 전에 아이 엄마를 묻고 오는 길입니다. 너무 큰 슬픔을 겪어서 지금 아이들이 정신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남자는 순간 멍해졌다고 한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구나, 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가끔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욕하며 소리지르는 사람들을 본다. 성격이 나쁘거나 감정 조절을 못 해서일 수도 있지만, 위 아버지처럼 어떤 사연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직장을 잃었거나, 가까운 이를 떠나 보냈거나, 크게 실패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악의적인 행동 이면엔 깊은 상처나 슬픔,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말 들어본 적 있나? "악의 근원에 깊은 슬픔이 있다"는 말. 이는 '인간의 부정적인 행동이나 악한 행위가 실제로는 그 사람이 겪은 깊은 상처나 고통에서 비롯된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누군가가 공격적이거나 잔인한 행동을 할 때, 그 아래에는 대개 오랫동안 쌓여온 슬픔, 좌절, 소외감 같은 깊은 감정적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해결되지 못한 채 쌓인 울분은 분노나 증오로 변질되거나 심하면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범죄를 정당화하는 말은 전혀 아니다. 비슷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남을 돕거나, 오히려 성숙해지는 이들도 많으니까. 중요한 건, 각자의 아픔, 상처를 어떻게 승화시키느냐가 이후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나의 상처, 고통, 아픔을 절절히 보고나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악의적인 행동 이면에 상처나 슬픔,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누군가가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면 ‘쯧쯧’ 혀를 차고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갔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대체 저 사람의 마음엔 뭐가 있어 저렇게 악에 받친 걸까?'
어쩌면 저들도 나처럼 말 못할 아픔,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매번은 아니지만, 자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내게 사기 친 개새끼들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면에 어떤 고통이 자리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면서 조심스레 '용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용서라는 말을 아주아주 싫어한다. 그건 가해자를 위한 면죄부이자, 악을 정당화하는 단어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치유되지 않은 슬픔과 고통이 더 큰 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자, 용서에 대해 다른 생각이 올라왔다.
용서는 상대가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용서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면죄부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선택이다.
용서는 관계를 회복하려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관계를 끊어내는 선택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끝모를 분노와 증오심이 나를 더 깊은 어둠에 가둘 것이다.
하여 처음으로 용서를 떠올렸다.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울분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럴지라도, 가능하면 용서를 한번이라도 더 떠올리려고 한다.
내가 이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를…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힘이,
자신의 고통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학대를 견디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것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데이빗 그리피스(시인), "힘과 용기의 차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