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갔다.
이전에는 고통을 가능한 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고통에도 숨은 보물이 있다는 걸 안다.
행복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행했기 때문에 자신을 갈고 닦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는 특유의 재치와 입담으로 유명하다. 그 유머의 시작은 다혈질이었던 아버지였다. 전직 복서이자 경찰이었던 아버지는 쉽게 화를 냈고, 집안은 늘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코미디를 볼 때만큼은 달라졌다. 그때부터 레이놀즈는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유머를 '생존 기술'로 익혔다. 어릴 때부터 갈고닦은 입담은 무명시절 출연한 시트콤에서 빛을 발했고, 이후 <데드풀>로 이어졌다. 그는 말한다. "나는 주먹이 아니라 재치로 버텼다."
짐 캐리 역시 비슷했다. 그는 14살 때 아버지 실직으로 집안이 어려워져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우울한 현실 속에서 가족을 웃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매일 거울 앞에서 표정과 목소리를 연습했다. 그 절박함은 훗날 그를 세계적인 배우로 만들었다. 그는 말했다. "절박함은 무언가를 배우거나 만드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재료다."
고통이 창조의 불씨가 되는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 <록키 발보아>(2007)에서 록키가 아들에게 말한다.
"세상이 늘 행복하고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냐. 매우 못돼먹고 추악한 곳이지.
네가 얼마나 강하든 간에, 세상은 널 무릎 꿇릴 거다.
중요한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내는가 아냐.
얼마나 얻어맞고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가느냐지.
그게 '이긴다'는 거야."
살면서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얻어맞는다.
나도 그랬다. 녹다운될 만큼 크게 부서졌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이 대사가 유난히 마음에 남는다.
돌이켜보면, 자산이 되는 경험은 언제나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상처, 더 큰 결핍이 있었던 시간들이 나의 힘이 되고,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외로움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때, 글은 나의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글을 쓰면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았다.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이 정돈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로움이, 나를 작가로 이끌었다.
뿐만 아니다. 어릴 때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극단적으로 절약해야 했다. 아버지는 물 두 바가지로 샤워하셨고, 우리는 종이 한 장도 아껴 써야 했다. 덕분에 돈의 가치를 배웠다. 버는 족족 모으는 습관, 절제하는 소비 습관은 그 시절이 남긴 가장 단단한 유산이다. 덕분에 돈을 잘 모은다.
하지만 절약이라는 장점 뒤엔 풍요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결핍도 있었다.
좋은 게 있으면, 반드시 아쉬운 것도 있다.
인생은 그렇게 균형을 맞춘다.
좋은 일이 나쁜 일로 바뀌기도 하고, 나쁜 일이 좋은 일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사기 사건은 내게 엄청난 고통을 줬지만, 동시에 내 안의 모험심을 일깨웠다. 가진 돈을 모두 날리자, 아무것도 없던 20대 시절의 패기, 무모함, 저돌성이 되살아났다. 스티브 잡스의 “늘 자신이 배고프고 어리석다고 여기길 Stay hungry, stay foolish.” 이 말이 그 어느때보다 가슴 깊이 와닿았다.
고통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결핍은 나를 배우게 했다. 무너진 자리에서 나는 새로이 시작하는 법을 배웠다. 나를 나락으로 끌 고 간 이 일이 언젠가는 내 삶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 책의 글감이 될 수도 있고, 강연의 주제가 될 수도 있고, 사업의 바탕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삶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고통 뒤에는 언제나 기회가 숨어있고,
기회 안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인생은 꽤나 공평하다.
이 일이 어떤 일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지금의 고통과 시련이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걸 믿고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