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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복수란

by 김글리


진정한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전 재산을 잃고,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어느 날 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죽고 싶지 않았을까만은, 그보단 복수심이 5백만배는 더 강했다. 사기 당하고, 나는 매일 밤 복수를 꿈꿨다. 분노가 치솟을 때마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로 그들을 처단했다. 상상속에서 수천 번도 더 죽였다. 매일 사기꾼들이 망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냥 망하는 게 아니라 매우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거나 사고사로 아주 고통스럽게 죽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분노와 무력감 속에서 내가 찾은 방법은 복수를 다룬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뿐! 범죄자가 어떤 식으로든 처벌받는 걸 보면 그나마 숨통이 좀 트였다. 그중에서도 SBS 드라마 <모범택시>는 복수의 쾌감이 컸다.


<모범택시>는 범죄자들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사적으로 복수하는 이야기다. 장성철(김의성)은 젊은 시절 연쇄살인마에게 부모를 잃었다. 복수심에 불탄 그는 법이 못한 정의를 대신 실현하기 위해 자신처럼 범죄자들에게 가족을 잃은 이들을 모아 택시회사 '무지개 운수'를 세운다. 겉으론 운수업이지만 피해자들의 의뢰를 받아 복수하는 게 이들의 진짜 업무다. 무지개 운수의 핵심 전력인 김도기(이제훈) 역시 연쇄살인마에게 어머니를 잃은 경험이 있다. 여전히 뜨거운 증오와 복수심을 안고 살아가는 그에게 장성철이 이런 조언을 한다.


"복수는 상대방을 망가뜨리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더라.

오롯이 너의 삶을 살아갈 때 그때 비로소 복수는 완성되는 거야."


고통을 준 상대가 무색하리만큼 잘 사는 것이 진짜 복수라… 이 말을 듣고, 한 여자가 떠올랐다.




그에게 단 1분도 더 쓰지 않겠어요


플로리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샐리(가명)라는 여성이 야간에 공원을 조깅하던 중 강도를 만났다. 샐리는 강간당한 뒤, 머리에 총을 맞고 거의 죽을 뻔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부상으로 시력은 완전히 잃고 말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샐리가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사회자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한 분노, 원한,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얼마나 컸나요?"


그러자 샐리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전 그에게 더이상 분노하지 않아요.

그 남자는 제 인생에서 단 하룻밤을 앗아갔을 뿐이에요.

그에게 단 1초도 더 쓰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다시는 복구되지 않을 큰 고통을 준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난 아직도 사기꾼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고, 사기라는 말만 들어도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하지만 이 여성은 정말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 그녀는 1분 1초도 가해자를 위해 쓰길 거부했다. 소중한 시간을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데 쓰는데도 모자라니까.




상처 입은 치유자


사기 당하고 분노가 치솟을 때마다, 나는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며 나를 돌아봤다. 내면을 들여다보다 보니, 내가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보였고, 그 안에 담긴 나의 오래된 상처가 보였다. 내 아픔을 보자, 세상의 고통도 보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20살까지, 9년동안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자가 있었다. 견디다 못해 몇 번 가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그때마다 그녀는 아버지라는 괴물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 "납치됐다"라는 신고를 통해 마침내 지옥에서 해방됐다.


그녀는 성폭력 상담소의 쉼터에서 지내면서 대학을 졸업했고, 온갖 상담을 다 받아 가며 수년 동안 처절히 노력한 끝에 자신의 삶을 조금씩 되찾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를 썼다. 김영서 작가 이야기다.


"상담소에 있을 때 선생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네 잘못 아니고 네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처음엔 귀에 안 들어왔는데 계속 듣고 책도 보고 생각하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어요.'난 더럽혀지지 않았고, 망가지지도 않았다.'"


현재 그녀는 비슷한 아픔을 겪는 이들을 상담해주는 '운디드 힐러'로 활동하고 있다.

'운디드 힐러 Wounded Healer' 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의미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고통을 이겨낸 이들은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겪은 이들을 훨씬 더 잘 이해하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녀는 '굳이 왜 고통스런 이야기를 책으로 썼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상처를 노출하는 것은 단순히 상처를 열어 보이고

'마이 아파'라고 말하려는 의도가 아니에요.

상처에 앉은 딱지와 이미 새살이 돋아 볼록하게 솟아오른 내 일부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려는 거죠. '이 약을 써보세요. 이런 방법이 참 괜찮네요.'"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굳이 나의 치부를 꺼내 책으로 쓰는 건,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결국 내가 나누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된다.”는 말이 있다. 내 고통을 개인적 불행으로만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다양한 이유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내가 처했던 깊은 어둠의 경험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선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을 경험하면서, 세상의 고통이 더 깊게 와닿았다. 알고보면 누구나 자기만의 상처를 갖고 있다. 그 상처와 고통은 결코 숨기거나 피해야 할 게 아니다. 우리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상처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보여주는 지도이자, 앞으로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다.


"돌아보면 내가 상처라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았다.

'축복 blessing'은 프랑스어 '상처입다 blesser'와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

- 류시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중에서


심리전문가 스테판 조셉은 "트라우마는 우리 마음이 무엇에 고정돼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모닝콜과 같다."고 말했다. 트라우마로 인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철저하게 허물어지지만, 그 이후 새로운 삶이 다시 세워질 수 있다. 불행은 어쩌면 우리가 누구인지,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알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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