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힘을 길러주는 건 행복이 아닌 고통
영화<미스 리틀 선샤인>(2006)에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전투기 조종사를 꿈꾸던 소년은 자신이 색맹임을 알게 된다. 절망한 그는 삼촌에게 말한다.
"너무 힘들어요, 18살 때까지 잠만 잤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삼촌이 대답한다.
“너 프루스트라는 작가를 아니? 그는 완벽한 패배자였어.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평생 짝사랑했지. 그런데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말했어.
실은 가장 힘겨웠던 시절이 사실은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그 시간이 자신을 만들었으니까. 반대로 행복했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대."
처음엔 흘려봤던 이 장면이 시간이 흐를 수록 다르게 다가왔다.
돌아보면, 가장 힘겨웠던 순간이 나를 가장 단련시킨 시간이었다.
내 인생에도 그런 시간이 많았다.
열등감에 휩싸여 지냈던 10대,
방황으로 가득했던 20대,
이번 생은 망했다고 생각했던 30대 초반…
그때 애쓴 시간들이 지금 나를 만든 재료였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고마움은 많다.
그 시간을 눈 감고 지나오지 않은 것에, 그 시간 동안 쌓을 수 있었던 경험에 대해서.
내면의 깊이는 그냥 쌓이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밤은 번민으로 보내고,
고통으로 처절하게 몸부림치면서 조금씩 쌓여간다.
그같은 고통이 없다면 누구도 내면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는다.
잊지 말아야 한다. 내면의 힘을 길러주는 건 행복이 아닌, 고통이라는 걸.
“모든 것이 순조롭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는 진정한 회복력을 키울 수 없다.”
-토비 뤼트케, 쇼피파이 창립자
하지만 무작정 버틴다고 상황이 좋아질까?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쉽진 않다. 이에 대한 답이 <루이 Louie>라는 미국 시트콤에 나온다.
주인공 루이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어느 날, 공연 중 매니저와 싸우고 홧김에 일을 때려치운다. 한 선배 코미디언을 만나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자, 이렇게 조언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때려치지 말고, 무조건 버텨."
"버티면 언젠가 나아질까요?"
"상황이 좋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진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더 나아질 거야."
이 말이 뼛속까지 박혔다.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내가 바뀌면 이미 다른 세상이다. 이 생각만으로도 힘든 시간을 버틸 힘이 생겼다. 요즘 나는 확실히 느낀다. 역대급으로 힘든 시간을 버티다 보니 고통에 대한 내성이 높아졌다는 걸. 예전만큼 쉽게 좌절하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그만큼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피하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빨리 잊으려 하고, 무시하거나 합리화하며 도망쳤다. 하지만 겪어보니, 고통을 피하면 고통은 더 커진다.
부처는 말했다.
"인생이 고통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서는,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삶은 본질적으로 잃어가는 과정이다. 가족을 잃고, 건강을 잃고, 물질을 잃고, 관계를 잃고, 종국에는 이 몸마저 잃는다. 인생이 고통 자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끝없이 저항하다 더 큰 고통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삶이라는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안젤리나 졸리가 이런 말을 했다.
"고통을 느끼고 그 안에 머무르세요.
피하지 말고 온전히 고통과 함께 하세요.
모든 걸 느끼고 그대로 지나가면, 다른 쪽으로 나올 수 있어요."
즉, 두 눈 똑바로 뜨고 고통 속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고통을 끌어안는 순간, 고통은 나를 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나를 단련시키는 스승이 된다.
‘위기(危機)’는 두 가지 뜻을 품고 있다.
위험과 기회.
그 일이 내 인생을 무너뜨릴지, 아니면 변화시킬지는 그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전적으로 책임을 졌다는 것.
윌리엄 제임스는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늘 병약했고, 무능하다는 낙인 속에서 살았다. 아버지의 인맥으로 간신히 의대에 입학했지만 그만두고, 탐험대에 합류해 아마존으로 떠났다. 용케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나이 서른이 넘도록 직업도 없었고 하는 일마다 족족 실패했다.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다 철학자 찰스 퍼스의 강의록을 읽고, 작은 실험을 해보기로 마음먹는다.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앞으로 1년 동안,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뭐든 100% 내 책임이라고 믿고 살아보겠다."
그 결심 하나가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꿨다. 이후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스스로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다."
책임진다는 건, 남 탓을 멈추고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일이다.
고통이 닥쳤다면, 그건 내 몫이다.
피하지 않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순간,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실직했거나, 사고 당했을 때 우리는 두 갈래 길 앞에 선다.
-누군가를 탓하며 분노 속에 머물 것인지,
-이 현실을 내가 감당하고 극복할 문제로 받아들일 것인지.
책임지는 삶은 후자에서 시작된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고 평생 걷지 못할 거라는 선고를 받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걷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육상부분 3관왕을 차지했다. 그녀의 이름은 윌마 루돌프. 그녀는 말했다.
"난 다른 사람들이 내 운명을 결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말을 나도 마음에 새겼다.
내 삶에 일어난 일은 모두 내 책임이다.
내 잘못으로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어떻게 대응할 건지는 내 몫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남 탓과 원망을 하며 살 수밖에 없다.
윌리엄 제임스처럼, 나도 일기에 적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전적으로 책임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