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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마라

전 피해자로 살지 않을 겁니다

by 김글리

전 피해자로 살지 않을 겁니다


사기 사건 이후, 나는 오랫동안 피해의식과 원망 속에서 지냈다. 세상은 멀쩡한데, 내 세상만 무너졌다는 게 억울했고, 화가 났다. 세상을 원망했고, 사람들을 원망했고, 가족들을 원망했고, 나를 원망했다.


피해의식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사람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누구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교류가 끊기자 깊은 고립감이 찾아왔다. 그렇게 1년이 흐르자, 삶이 점점 피폐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이런 물음이 올라왔다.


'대체 언제까지 피해자로 남아있을 거야?'


피해를 입었지만, 언제까지 피해자로 주저앉아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내 삶을 살아내야 했다. 나의 피해의식을 이해하고 다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


불교 경전 <잡아함경>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


살다 보면 누구든 질병, 사고, 배신, 상실 등을 겪게 마련인데 이게 첫 번째 화살이다. 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사건이나 고통 그 자체다. 두번째 화살은 그것에 덧붙인 감정과 해석, 반응이다. 첫번째 고통을 겪을 때 '마음 속으로 스스로 만들어내는 추가적인 고통'이 발생한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지? 받아들일 수 없어!' 라는 분노, 원망, 후회, 자기비난, 두려움, 불안, 집착과 같은 부정적 감정과 생각들이다.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지만, 두 번째 화살은 우리가 쏘지 않을 수도 있다.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고 당부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 상황이나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감정에 집착하지 않기에,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


첫번째 화살은 누구나 피할 수 없지만, 두번째 화살은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냐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다'는 게 핵심이다.




“사고를 당한게 아니라, 사고를 만났죠.”


방송에서 이 말이 듣고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지선아, 사랑해" 라는 문구로 유명한 이지선 씨의 말이었다.


이지선씨는 스물 세 살에 음주 교통사고로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친오빠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 음주운전자가 그녀가 탄 차를 뒤에서 들이받으며 차에 불이 났다. 그 사고로 이지선 씨는 전신에 55%에 3도 화상을 입어 피부가 녹아내렸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이전의 얼굴과 몸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후로도 40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해야했지만, 주변와 도움과 본인의 의지로 꿋꿋이 삶을 개척해갔다. 그녀는 끔찍한 고통을 겪어내면서도 친구들과 농담하며 웃음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투병 경험을 기록해 책으로 내었다. 이후그녀는 학업에 매진해 현재는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사고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녀는 '피해자'로 남길 거부했다. 그 사고로 이전의 삶은 끝났지만, 새로운 삶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이다.


“저는 사고를 ‘당했다’가 아니라 ‘만났다’고 말해요.

그 사고로 인해 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됐거든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상처에 머물지 않고, 다시 내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고 이후 그녀는 오늘 하루를 잘 사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오늘살이'라고도 표현한다.


"어제를 살지 않고 오늘을 살다 보니 세상에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나쁜 일이 그날 밤 내게 일어났을 뿐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지선, <꽤 괜찮은 해피엔딩> -17, 18쪽



남 탓도, 자기 탓도 하지 않는 법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는 부처의 가르침과 이지선씨의 삶은 스토아 학파의 핵심 원리와 매우 닮아 있다. 스토아 철학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것"을 가르친다. 타인의 행동, 외부 사건, 과거 등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첫번째 화살) 하지만 내 생각, 감정, 반응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다. (두번째 화살)


따라서 스토아 학파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집중할 것"을 강조한다. 두 사상 모두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고통, 불운은 받아들이고, 대신 나의 태도와 마음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잘 보여준다. 이는 다시 말하면 내 삶의 주도권일 내면에 두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스토아의 대표 철학자 중 하나인 에피테토스의 명언도 이와 결을 같이 한다.


"문제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판단에 있다."


고통의 원인을 어디에 두느냐는 회복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남 탓만 해도, 자기 탓만 해도 길을 잃는다. 중요한 건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어떤 일이 발생할 때는 많은 요소가 개입돼 있기 때문에, 안팎으로 상황을 살펴야 한다. 다음은 상황을 균형있게 분석하도록 도와주는 질문들이다.


1. 무슨 일이 일어났나?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정리해본다.

2.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는 무엇이었나?

3. 내 판단이나 태도에 영향을 준 요소는 뭐였나? 다르게 할 수 있었던 선택은 무엇인가?

4.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은?


위 질문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통제할 수 없는 요소와 통제할 수 있는 요소를 분리해 생각하게 만든다. 피해의식을 다루는 것은 '제거'가 아니라 '균형맞추기'에 가깝다. 한쪽으로 치우쳐진 자신의 생각들을 인식하고 이를 건강하고 균형 잡힌 생각들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피해의식이 올라올 때 어떤 생각들이 내 안에 맴도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를 건강하게 해석하고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때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내 안을 들여보기 시작했다. '어떤 상황이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때 어떤 생각이 올라오는가?' 피해 받았다고 느낄 때 그를 기록하면 좋다. "오늘 오후 2시경, 팀장님이 내 의견을 물어보지 않았을 때 소외감을 느꼈다", "친구가 무표정하게 툭툭 던지는 말투가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록하면 반복되는 감정패턴을 알 수 있고, 나아가 내가 어떤 상황에서 피해의식을 느끼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내 생각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를 받았다면, 그 상황을 내가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것이 적절했는지도 스스로에게 물었다.피해의식을 가진 이들은 '억울함'이 많은 이들이다. 부당한 대우를 참아오면서도 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 이런 억울함이 쌓인다. 따라서 내 입장을 제대로, 차분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부당한 요구나 부탁을 받을 땐 분명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연습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갑자기 업무를 떠넘기는 동료가 있다면 "미안하지만 저도 바빠 어렵습니다.” 혹은 “이 부분은 도와드릴 수 있어요.”와 같이 말하는 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과 아닌 부분을 명확하게 가려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건강한 경계 설정과 연관된다. '내 마음과 권리를 지키되, 상대방도 존중하는 태도'를 훈련하는 것이다. 내 의사를 정중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되, 때론 단호하게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경계 설정은 진정성 있고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만드는 밑바탕이 된다.


피해 의식이 올라올 때마다 위 훈련을 반복하며 두 어달을 지냈다. 덕분에 나의 감정과 생각도 많이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행히도 '세상을 적'으로 보는 극단적인 피해의식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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