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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 Oct 14. 2021

새하얀 복층 오피스텔

 처음 방문한 꼭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복층 오피스텔이었다. 풀옵션에 새하얀 인테리어인 복층 집 말이다. 월세가 상당한 터라 쳐다도 안 봤던 곳을 앞으로 살게 될 집 후보 중 하나가 되자 아픈 머리와 별개로 심장이 아프기 시작했다.


 혼자 살기 좋고 깔끔하다는 장점을 얘기해주는 중개업자의 말에 귀가 나비 날갯짓처럼 팔랑거려 낯선 이에 대한 무서움도 잠깐 접어둔 채 당장 이 집을 계약할 사람처럼 관리비는 얼마고 전 세입자가 얼마나 살았는지 따위의 질문을 떨리는 목소리로 쏟고 있었다. 너무 마음에 드는 티를 팍팍 내던 나를 데리고 대표님은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섰다. 대표님은 저 방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큰 도로가 아닌 골목길에 위치한 오피스텔에다가 창문은 크지만 바로 앞에 건물이 있어 커튼이 없으면 사생활 보호가 전혀 안 되고, 무엇보다 낮 시간인데도 해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위치라고 지적하셨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지만 풀옵션에 하얗고 뽀얀 인테리어에 거뭇거뭇한 마음이 솔솔 휘감겨 그 정도라면 어찌어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을 흘겼다. 이전에 살던 집도 해는 잘 들었지만 곰팡이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런저런 질문으로 원하는 방의 취향을 대강 알겠다고 하신 대표님은 처음 방을 본 내 태도를 보고 혼자 두면 이상한 방을 계약해 올 것 같다며, 잠깐 쉬는 동안 쪼끔 기력을 차린 내가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여기저기 발로 뛰어다니시며 방 후보를 몇 개 추려오셨다.


 부동산중개소 3군데를 다니셨고 하루에 해 들어오는 시간까지 계산해 방을 봐주시곤 했다. 무척 죄송하고 감사했지만 처음엔 대표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낱 직원 한 명 때문에 수고스럽게 그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뭐 실세를 꽉 쥐고 있는 대단한 인재도 아니고 대체 인력이라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말이다. 


 왜 그렇게까지 해주셨을까.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며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해보고 있을 때 잠시 사무실에 들어오신 대표님은 지금까지 여러 사람과 일해봤지만 실수는 잦아도 그만큼 개인비서처럼 여러 가지 일을 군말 없이 케어해주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도와주던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는 말을 해주셨다.


 3개월 만에 저를 하나 복제해놓고 나가겠다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이러니 저러니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각인시켜주시고 아팠던 걸 왜 여태 말을 안했냐고 몇 번이나 타박하셨는지 모른다. 퇴사가 보류된 후 몇 안 되는 가까운 지인에게 하소연을 했을 때 그건 그만큼 능력을 높게 봐주는 거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아프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만 끙끙 앓아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약점을 절대 타인에게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으며 가족은 물론 같이 사는 친구에게조차 말할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쿠크다스 과자처럼 연약한 긍지에 살짝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약점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말은 뼈저리게 느낄 정도로 잘 알고 있지만 오래도록 가까이 지낸 사람이나 믿어도 될만한 사람에겐 커다란 보따리를 조금 풀어놔도 되지 않을까 싶다. 다는 말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살짝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그 살짝 들춘 것만으로도, 사방이 가로막힌 폐쇄공간에 숨길이 뚫리듯 감정을 환기시키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어떻게든 출근하고 대표님의 권유로 점찍어두셨다는 집을 보러 갔다. 1~3층이 상가인 오피스텔의 6층. 세입자가 살고 있는 방으로 중개사와 함께 들어간 곳은 복층은 아니었지만 혼자 살기 충분한 8평 풀옵션 원룸이었다.


 게다가 아침 시간에 갔는데도 남향이라 창가로 해가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베란다 확장형에 붙박이 장이 두 개였고 원룸이지만 가구를 배치해 공간을 나누는 게 가능해 보이는 크기였다. 아직 세입자가 살고 있는 중이라 이미 가구가 배치되어있었지만 어디를 침실 공간으로 나누고 어디를 취미공간으로 나눌지 제일 잘하는 공상을 마구마구 펼쳐놓기 시작했다. 


 대표님은 두 말할 거 없이 여기로 계약하라며 부추겼지만 직접 살아야 될 나는 침착하게, 침착하게 이전처럼 자취방 구할 때 꼭 봐야 하는 체크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해보았다. 시간이 적으니 둘러보며 눈에 띄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하나하나 적어보았다.



장점

★ 직장까지 걸어서 8분 거리이다. -> 사람과 부딪히는 시간이 단축된다.

★ 바로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다. -> 부득이하게 움직여야 될 상황이라면 최소한의 이동으로 갈 수 있다.

상가 1층이 은행이다. -> 보안이 타 건물에 비해 철저하다. (그렇지 않을까?)

엘리베이터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처럼 넓다. -> 가구, 짐을 옮기기에 수월하다.

남향이라 해가 잘 든다. -> 한쪽 벽면이 통창이라 햇빛이 방안을 훑기 충분하다. 빨래가 잘 마른다!

바닥이 마룻바닥이다. -> 장판이 아니어 바닥 틈에 이물질이 끼거나 벌레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붙박이 장 외에도 수납공간이 많다. -> 자잘한 짐들을 수납해서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다.

화장실에 샤워부스가 있다. -> 습기 제어하기에 좋다! 즐거운 샤워시간!

★★반려동물 가능 -> 나의 고양이와 같이 살 수 있다!


단점

바닥이 마룻바닥이다. -> 디자인이 틈새가 약간씩 벌려져 있는 디자인이라 청소가 어렵다.

통창이지만 환기용 창문이 작다. -> 바로 현관을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아니라 환기가 어렵다.

보일러실에서 습기가 소음이 그대로 올라온다. ->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될 부분이다.



 그리고 제일 좋은 점은 이전 세입자가 4년이나 살았고, 4년이나 살았는데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곰팡이가 없었다. (과연!) 해가 잘 들고, 대부분 괜찮은 조건에 대표님의 지인 공인중개사 분께서 소개해준 방이기에 무려 월세를 깎아주겠다고 했다. 왜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해주시나 혹시 큰 하자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작지도 않은 풍채로 몰래몰래 집을 돌아다니며 꼼꼼히 살펴봤지만 꼭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집에선 큰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 보게 된 집은 새하얀 오피스텔 복층 집이 아니어도 몇 가지를 감수하면 혼자 살기 제법 쾌적한 공간이었다. 하루빨리 사람과의 접촉을 줄여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지만 다른 여러 가지 조건에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면 기대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내 집. 내가 원하는 방. 내 취향대로 꾸민 방. 나의 방! (비록 월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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