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15년 가까이하면서 느낀 어려운 점은 일보다는 역시 사람 관계인 것 같다. 맡은 업무가 순조롭게 흘러가더라도 팀원들 중 마음이 안 맞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출근하는 게 스트레스였다. 업무가 힘들게 흘러가도 팀원들이 모두 힘을 북돋아 주고 어려움을 공감해주면 정말 큰 위로가 된다. 업무도 안 풀리고 이상한 사람도 옆에 있으면 정말 답이 없다. 내 일만 잘하면 되지 남들이 무슨 상관이냐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사회생활인 것 같다.
게다가 업무의 특성상 민원인 응대를 10년 넘게 하다 보니 사람이 싫어지기도 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민원인의 유형은 다짜고짜 욕부터 시작하는 사람, 교양 있어 보이지만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 무조건 억지 부리며 말이 안 통하는 사람, 그리고 상담해 주는 나를 자기 아래 있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사람 등이다. 호주에 올 때, 호주는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인데 걱정된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개개인의 인성 문제이지 모든 사람들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있어도 소위 갑질 하며 다른 이를 무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정말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큰아이가 저학년일 때는 아이들의 학교 학부모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회사생활의 인간관계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아이가 반대표가 되어서 반모임을 주선하거나 다른 엄마들과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일들은 정말 부담감이었고 왠지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안 될 것 같아 불편하였다. 신기하게도 우리 동네는 저학년 엄마들 중에는 워킹맘이 몇 명 안되어서 약속시간을 저녁이나 주말로 하면 안 되겠냐는 말을 하기도 눈치 보였고 사실 어린 둘째 아이도 있어 퇴근 후 집을 비우고 모임을 나가는 것도 부담이었다. 나름 꼭 나가야 할 모임은 신경 썼는데도 아이는 내버려 두고 자기 생활을 우선한다는 말을 은근슬쩍 돌려 얘기하는 것도 들었을 때는 많이 속상하기도 했다.
아이가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학년초의 반모임에 나가서 인사 정도만 하고 그 후로는 내려놓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란법이 추진되면서 아이가 반대표가 되어도 학교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하여 나에게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 큰아이는 스스로 잘 챙기고 엄마가 힘들까봐 배려도 잘해줘서 내가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나는 항상 사람들과 관계가 쉽지 않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호주에 와서 처음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 환경은 걱정스러우면서도 엄청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마음의 스트레스와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하나씩 없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남편이 자신의 직장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가 아닌 한국사람이 거의 없는 동네를 거주지로 정한 이유 중에 하나도 나의 조용한 사생활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처음에 망막했던 아이들의 학교생활은 서너 명 밖에 안되지만 친절하고 따뜻하게 도와주는 한국 엄마들이 계셔서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모여 그동안 못했던 한국말로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보면 일상의 스트레스가 해소되곤 한다.
초등학교 뒷동산 _ 멀리 바다가 보이는 이 뒷동산을 아이들이 술래잡기하며 뛰어다닌다
일 년 정도 지난 지금은, 역시 큰아이는 스스로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어서 거의 신경쓰지 않고 있고 작은아이의 경우는 등하교를 데려다주고 놀이터에서 놀다 보니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작은아이가 친한 친구들은 왜 모두 외국인인 건지, 사실 나는 여기서 진짜 호주 출신이라고 하는 사람을 거의 못 만난 것 같다. 서양인처럼 생겼어도 얘기하다 보면 뉴질랜드나 이스라엘, 유럽, 남미 등에서 왔다고들 한다.
집도 가까워서 거의 매일 만나는 중국 친구 엄마는 공무원인 남편을 따라 자신의 직장을 휴직하고 왔는데, 작년 말에 남편이 중국으로 출장을 갔다가 코로나로 인하여 중국집에 격리되고 그 후에는 호주가 외국인에게 국경을 봉쇄하면서 아직도 호주로 못 돌아오고 있다. 그 전에는 아빠가 항상 아이를 데리고 다녀서 엄마를 만나지 못했는데 딸바보인 아빠가 딸을 못 봐서 엄청 힘들어하고 계신다고 한다. 딸이 아빠가 만든 음식을 더 잘 먹어서 요리도 아빠가 한다고 하는데 이 중국 엄마는 나더러 한국 남자와 살아서 좋겠다고 한다.
“중국 아빠는 애도 맨날 돌봐주고, 요리에 집안일도 다 하시잖아”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 한국 남자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
“내가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는데 한국 남자들은 무척 바쁘더라, 그래서 집안일을 못하는 거야.”
역시 드라마가 문제였다. 이 중국 엄마는 본인은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보다 훨씬 잘하시기에 주로 나는 듣는 편인데,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영어를 못하니 답답할 뿐이다.
“나는 젊을 때 한국 남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어서 정말 아쉬워.”
“You’re so lucky.” 한마디로밖에 표현 못했지만 내 마음을 알아들었으려나.
오늘도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들과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여기는 초등학교도 제2외국어를 배우는데 우리 학교는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중에서 선택이다.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없다고 멀리서 매일 아이를 등교시키는 우크라이나 출신 엄마, 호주로 파견 나온 변호사인 베트남 엄마, 그리고 앞의 중국 엄마는 거의 매일 놀이터에서 만나는 멤버가 되었다. 모두 네이티브가 아니라 편한 건지 나의 영어는 갈수록 엉망이 되어가는데 우리는 점점 더 소통이 잘 되가는 느낌이 든다.
저녁에 뭘 해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만국 공통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 : “요리하기 싫은 날은 그냥 고기만 구워 먹음 어때?”
베트남 엄마 : “고기 구워서 김치하나 올려먹음 그만이지!”
중국 엄마 : “그래? 나 어제 김치 사 왔는데, 우리 애는 끓인 물에 김치 씻어서 먹여야겠다”
음, 고기는 쌈장이 필수인데, 고기와 김치가 그렇게 찰떡궁합이라는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끓는 물에 김치를 씻어 먹인다는 사실도. 오늘 저녁은 고기에 얹은 김치? 어쨌든 나는 지금 호주에서 일과 사심이 섞이지 않은 가벼운 대화와 복잡하지 않은 인간관계로 어수선하지 않은 마음의 평온을 경험하고 있다.
호주 마트에서 파는 김치. 얼마나 건강한 음식인지 별점으로 표시하는데 김치는 최고점인 별 다섯 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