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
구린 날씨. 구리지 않은 기분의 날. 오늘은 그다지 우울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7만원이 아까워졌다.
이틀 전 충동적으로 신청한 인생 첫 심리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오르자마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오늘은 딱히 우울하진 않았지만, 심리상담에는 딱 어울리는 서늘한 날씨였다. '최저 기온 16도 최고기온 21도입니다' 라 구글 홈 ai 가 말해주었는데도 얇은 블라우스만 한 장 입고 나왔다. 가끔 결과를 알면서도 틀린 길로 가는 내가 한심하고 웃겼다. 깔때기 없이 생수통에 쌀을 옮겨 담는 거 같은 멍청함과 무모함이었다.
심리 상담 예약을 신청한 뒤 곧바로 상담소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금액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아니다. 좀 더 완곡한 표현으로 내가 최대 지급할 수 있는 금액과 최저 금액을 물었던 것 같다. 그래도 괜히 이상했다. 분명 심리상담금액과 선생님의 실력, 상처 치유의 결과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안내 글을 보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찝찝 했다. 10만원의 선생님에게 상담을 받으면 완쾌가 되고 7만원의 선생님에게 상담을 받으면 70%만, 4만 원은 40%만 되는 것인가. 아니다. 분명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이 처음이라 어떤 선생님을 선택해야 하는지부터가 어색하고 삐걱거렸다. '아... 7만원이요' 7만원. 4만 원은 걱정스럽고 10만원은 과한듯한 느낌에 결정한 나름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상담실에 자릴 잡고 앉아서야 이곳이 낯설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몇 년 전 친구가 살았던 고급 오피스텔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큰 창밖으로 펼쳐진 도심의 야경을 보며 다음 집은 도심으로 알아볼까, 아니 알아봐도 돈이 먼저지 하는 생각까지 이어졌고 생각보다 나는 우울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으로 결론지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아직 계약이 1년도 남은 집 생각을 하다니. 배고프다 투정 부리다가도 엄마가 먹을 것을 권하면 '아니 그런 거 말고!'라며 다시 투정을 덧붙이곤 했었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곧장 '네가 아직 배가 덜고프는구나'하고 단호히 말했다. 지금이 딱 그 모양새였다. '네가 아직 덜 우울하구나' 이 자리에 오면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고 속으로 반문 했을 때 미리 작성한 상담 서를 보던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그럼 서정씨는 어떤 것 때문에 오신 거에요?"라 물었고 "자주 눈물이 나서요" 라 답하는 동시에 눈물이 흘렀다. 수문을 개방한 듯 그때부터 눈물이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말끝마다 '아 제가 왜 이렇게 우는지 모르겠는데' 하는 말을 붙여 민망함을 숨기려 했다.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있어 선생님의 표정이 읽히지 않았다. 반응이 건조했다고 해야 할까? 따뜻한 위로 같은 것을 기대했는데 건조한 반응에 조금 무안해져 창밖도 자주 봤다. 풍경이 쓸데없이 좋았다. '서정씨 그런데 그건 서정씨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잖아요?' 선생님은 주로 질문을 하고 본인의 의견은 잘 덧붙이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이겼을 덧붙인 말이었다. 나에게도 또 가족들도 ' 근데 그건 너의 잘못도 있지'라고 결론 지었던 일이었다.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은 말에 코가 뜨끈해졌다. 아니요. 그건 제 잘못도 있어요 라고 쿨하게 답하려 했는데 눈물 때문에 뭉개진 목소리가 나왔다. 눈앞엔 전자시계가 있었다. 상담 시간 50분. 시간안에 많은것을 쏟아내야겠단 생각에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올해 초에 친구랑 절교한 일이라던가 아주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라던가 회사 이야기 까지 서로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두서없는 감정이 쏟아졌다.
" 음…. 감정이 많이 쌓여있는 거 같아요. 잘 생각해보시고 혹시 더 상담이 필요할 것 같으시면 왜 우울한 건지, 어떤 문제인 건지도 알아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
"아 네"
" 이렇게 털어놓으시니까 좀 어떠세요? "
" 글쎄요 조금 후련한 건가, 잘 모르겠어요 "
시간이 끝나가자 급히 무리 짓는 듯한 선생님에게 미량의 서운함과 머쓱함이 몰려왔다. 나의 가장 내밀한 속을 보여준 사람이라 그런가? 50분의 정이 들었나. 눈물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상담소를 나와 지하철역까지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울고 나서 촉촉해진 코로 들어오는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리고 역에서 집으로까지, 집에 가까워질수록 개운함을 느꼈다. 한 번도 내 안의 감정을 그렇게 속 시원하게 털어 낸 적이 없었던 탓일까. 케케묵은 먼지까지 털어낸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다음 상담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짓물러있던 상처에 딱지가 앉을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나의 우울은 만성 비염처럼 은근하게 제 존재감을 숨기지 않고 자주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주저앉진 않는다. 가끔 코를 훌쩍일 때가 있지만, 다시 또 괜찮아 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