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때 메로나’ 회사 사람들을 통해 들은 요즘 유행어, ‘올 때 메로나’가 왠지 낯설지 않다.
겨울밤이면 다급히 누군가에게 전활 걸어 그 비슷한 말을 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 올 때 아이스크림”
우리 모녀 3인방은 아이스크림은 겨울에 제 맛이라는 사람들이었다. 대구엔 눈이 안 와서 그런가,
추운 겨울 입속에서 눅진하게 녹는 하얗고 달콤한 그 덩어리가 눈같이 느껴졌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문밖으론 한 발도 나가기 싫은, 겨울밤. 우린 특히나 겨울밤에 자주 찾아오는 아이스크림의 욕구를 전화 한 통으로 해결했다.
“아빠 어딘데? 올 때 아이스크림 좀”
“뭔 아이스크림 이야 살찐다.”
“응응 괜찮아 찌지 뭐.” 하고 전활 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가 울렸다.
“무슨 맛” “그냥 , 초코 있는 거” 그냥 초코 있는 맛있는 아이스크림의 물음에 언제나 아빠가 가져오는 답은
월드콘이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까만 봉지 속 열개 정도의 월드콘. 왜 이렇게 많이 사 왔냐고 핀잔을 주면,
아빠는 무심히 “두고두고 먹어라” 하고 말았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아빠가 현관문의 종을 울리 면 동생과 나는 부스럭하는 봉지 소리가 나는지부터 확인하곤 했었다.
이 정규직 산타는 때론 빈손으로, 텔레파시만 보낸 어떤 날엔 붕어빵을, 가끔은 일식 튀김 같은 남은 술안주를 가져오기도 했다. 아빠의 정규직 산타 노릇은 내가 대학생이 되고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을 외치며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조금씩 뜸해졌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겨울 제철음식, 월드콘도 잊혀 갔다. 겨울밤의 달콤한
행복보다 255 칼로리라는 사실이 더 중요해진 우리 자매에게 더 이상 한밤중 월드콘은 반가운 선물이
아녔다. 거기에 나의 귀가시간이 아빠보다 늦어지는 것이 점점 잦아지면서,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추억이
되었다.
바람에서 쇠 냄새가 나는 겨울, 조금 엉뚱한 유행어, ‘올 때 메로나’는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빠는 아빠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엄마는 어머니, 아빠는, 아버지라 배운 나는 그 말이 왠지 어른 스러워 보여서 한 두 번 불러봤다가, 영 입에 붙질 않아 다시 아빠는 아빠가 되었다. 우리 집의 암묵적인 룰이 있었는데, 혼날 때는 존댓말을 써야 했다. 이건 엄마가 만든 룰로, 안 그래도 화가 났는데 콩 만한 게 말을 놓는 게 더 ‘꼭지를 돌게 해서’가 그 이유였다. 이 룰을 어길 때면, 어김없 이 “내가 네 친구냐?” 하는 한층 더 분노 섞인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빠에 게 이 룰을 적용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우애를 가장 중시하는 아빠를 앞에 두고 한가윗날 새벽, 거실 한 복판에서 동생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회초리 한 대를 맞았던 게 아빠가 나를 제대로 혼냈던
유일한 사건이었다.
주로 나와 링장에 올랐던 사람은 엄마였는데, 이 원인에 대해 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나와 아빠의 성격이 무척이나 다르다는 점이다. 성격이 너무 닮으면 많이 싸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덧붙일 수 있는 증거로, 아빠와 성격이 똑 닮은 동생은 아빠와 냉전을 벌인 게 한두 번 이 아니다. 대신, 나는 엄마와 좀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많은 부분을 이해해왔다. 엄마의 생일 선물은 쉽게 고르다가도, 아빠의 생일 선물은 한참을 고민하다 쓸데없는 노트나, 핸드크림을 주기도 했다. 반면 동생의 주말은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이 대부분이었고, 둘은 둘만의
추억을 많이 나누게 되었다. 동생이 쌈짓돈으로 준 만 원짜리가 프린트된 사각팬티는 아빠를 껄껄 웃게 했었는데, 운동을 하러 갔다가 탈의실에서 만원 팬티 때문에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고 말하는 아빠의 표정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으니 그 선물은 아빠 맘에 쏙든 선물은 아닐지라도, 아빠를 행복하게 한 선물임엔 틀림없다.
한마디로, 나는 아빠를 잘 몰랐다. 아빠의 취향도 잘 몰랐고, 아빠의 역사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 아, 많은 딸들이 가지는 잔소리 섞인 마음은 있었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 신지, 왜 그렇게 늦게 오는 건지, 같은 조금 두루뭉술하지만 진심 어린 걱정.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되고, 한해, 두 해가 흘러가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들을 듣고부터였다. 어버이날에 대구로 내려갔었는데, 엄마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뒤였고 아빠 혼자 나를 맞이했다. 벚꽃 구경을 못 했다고 아빠를 졸라 팔공산 드라이브를 나섰다. 아빠만의 비밀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며 데려다준 길이 유치한 말이지만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셔터를 끊임없이 눌렀고, 아빠는 중간중간 차를
세워 나를 기 다려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문득 아빠의 이 무뚝뚝한 다정함은 누구에게서 온 것일까 궁금해졌다.
큰아빠는 가부장제의 꼭대기까진 아니어도 그 언저리쯤 있으신 분이고, 고모들도 티는 안내 지만 아들이 최고라는 옛 분들이니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빠만, 우리 아빠만, 아빠의 형제들 속에서 다른 결을 지닌 듯했다. 할아버지가 끌어주셨던 리어카나, 마루에서 포슬포슬한 감자를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 줬던 그 기억을 더듬으며, 막연히 아빠의 다정함은 내가 10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서 온 것이리라, 그렇게 믿었다. 리어카는 천천히 부드럽게 끌리었고, 감자는 따뜻했으니까 아빠 또한 그런 할아버지의 다정함을 닮은 것이리라.
나는 부자의 달콤한 일 화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아빠의 대답은 담백하고도, 무거웠다.
“아빠, 할아버지는 어떤 아빠였어”
“ 그냥, 노인이었지, 태어나니까 아빠도 할아버지, 엄마도 할머니. 별로 뭐 추억도 딱히 없다”
애틋한 에피소드를 기대했던 나는 당황해서 그냥, ”아, 그렇구나 “ 하고 말았다. 위로를 해야 할지, 놀라야 할지 아주 잠시 고민하다 그 무엇도 하지 못했는데, 내겐 무거웠던 그 진실을, 아빤 남 이야기하듯 툭, 가볍게 던졌기 때문이었다.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짚어보며 띄엄띄엄 아빠를 다시 읊어본다.
1966년 10월 어느 날 청도군 방지 읍에서 그는 태어났다. 어느 날인 이유는, 그 옛날 시골에서 비일비재했던
일로, 동사무소에 신고가 늦어진 바람에 그에게 아무 날도 아닌 12일이 그의 생일이 된 것이었다. 가족들은 애정을 담아 ‘호야’라고 불렀다. 귀하디 귀한 막둥이, 늦둥이 아들이었지만 사실 그렇게 귀한 대접은 못 받았다. 지붕에서 놀다가 떨어진 막둥이에게 엄마는 엄한 매를 들어 더 다치기도 했다. 큰형은 너무 무서웠고, 누나들은 바빴으며, 엄마와 아빠는 엄했지만 노쇠하고 지쳐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유학을 시작했다. 청도를 조금 벗어난 곳에서 학교에 다니다 대학교는 부산으로 갔다. 그땐 결혼한 큰 형 네에서 지냈는데 신혼집에서 시작한 객살이는 너무도 눈치 보이는 일이었다. 눈칫밥도 먹고, 정말로 눈물 젖은 샌드위치를 먹기도 했다.
그렇게 자라온 그는 아빠가 되었다.
이젠, 내가 선명히 기억하는 아빠를 읊어본다. 크리스마스 당일날 아침이면, 명연기를 펼쳐 본인이 숨겨뒀을 선물로 나와 동생을 안내했고, 함께 놀라 주었다. 마치 몰랐던 양. 초등학교 6학년까지 산타의 존재를 믿었으니, 아빠의 연기는 꽤 탁월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빠의 명연기는 딸들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한 아빠의 노력이 었음을 지금은 안다. 내가 친구와 다녀온 남미 여행이 뭐가 그렇게 뿌듯한지, 아빠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2년째 내가 마추픽추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술이 들큼하게 취하면 우리 딸은 여기까지 다녀왔 다며 자랑한다고 한다. 이건 최근에 알게 된 아빠의 모습이다.
나이의 앞자리가 두 번 바뀐 나는 이제 아이스크림은 음주 후가 아니면 잘 찾지도 않고, 월드콘은 끝부분이 텁텁해서 끝 부분은 먹지않고 아이스크림 부분만 먹다가 버린다. 그래도 월드콘은 여전히 맛있다.
술 한잔 하지 않은 밤이지만, 오늘은 아빠 생각을 하며 월드콘을 하나 사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