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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칠이라는 농담

먹고 사는 일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다

by 쌈무
"삶은 너무 중요한 것이기에 진지하게 다룰 수 없다."
— 오스카 와일드,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책의 첫 페이지에서 이 문장을 마주하자마자, 이미 이 책이 어떤 톤과 메시지를 품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스티비의 책 증정 이벤트로 읽게 된 『풀칠이라는 농담』은 뉴스레터 <풀칠>에서 출간한 일러스트 에세이집이다.


밥벌이의 희로애락을 탐구하는 잡지답게, “세상에 먹고사는 게 다여서야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건네며 일과 삶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의 온도를 살핀다. 이 책은 발행인 이상우가 '풀칠러 스케치'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뉴스레터에 실어온 그림과 짧은 글들을 엮은 단행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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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데 걸린 시간은 채 30분이 되지 않았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림과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부담 없이 페이지가 넘어갔다. 그런데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여운이 남았다. 연말을 앞두고 커리어에 여러 변수가 생기며 먹고 사는 일에 지나치게 진지해지고 있을 때, 이 책은 생각의 무게를 살짝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은 〈자아 탐구〉였다.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진정한 나'라는 소프트웨어가 존재하며, 이것을 알아내는 것이 행복과 직결된다는 사고방식은 우리 시대의 유행이다....(중략)

자아 탐구는 '진정한 나'를 발견해 나가는 주체적인 도전처럼 보이지만, 자아를 탐구할수록 일상은 플랫폼(SNS)에 더 깊이 종속된다. 그렇게 더 잘 못 쉬게 된다."


자아 탐구를 더 깊이 할수록 오히려 '나'의 문제를 넘어 시대의 흐름에 매몰되기 쉽다는 지적이 와닿았다. 나 또한 일과 의미를 과하게 연결시키며 에고를 키웠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일에 의미를 찾는 건 중요하지만, 그 의미가 나를 옥죄기 시작하면 되려 본질을 잃어버린다.


책 속 표현처럼,
"먹고 산다는 건 좀 웃긴 일이다."

완전히 가볍게만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만 들고 갈 필요도 없다. 때로는 힘을 조금 빼는 것이 더 멀리 가기 위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연말처럼 생각이 너무 많아지는 계절에, 마음의 속도를 조절하도록 도와주는 작고 유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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