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전
남이 해줘야 맛있는 음식들이 몇 가지 있다. 나는 그중 하나가 '김치전'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엥? 김치 전? 그거 완전 초간단인데 쓰니 그것도 못해?라고 생각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김치전은 결코 초간단한 음식이 아니다.
우선 재료부터가 만만치 않다.
아주 맛있게 잘 익은 신김치, 부침가루, 오징어..... 이 정도인데
여기서 아주 맛있게 잘 익은 신김치부터 확보해야 하는 게 관건이다.
두 번째로는 부침가루.
부침가루야 곰표든 백설이든 어디든 구하기 쉽고 맛있지 않으냐 할 수도 있겠지만
부침가루로 정확한 농도의 반죽을 만들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부침가루가 조금만 더 들어가도 "너 지금 부침가루 많이 넣은 거임? 디졌다."하며 반죽이 떡반죽이 되고
부침가루가 조금만 덜 들어가도 "너 지금 부침가루 조금 넣은거임? 디졌다."하며 흐물흐물 찢어진다.
세 번째로 오징어.
그냥 썰어서 넣으면 되는 간단한 재료지만 오징어 가격이 옛날처럼 간단한(?) 가격이 아니다.
그렇다고 안 넣으면 맛이 없으니.... 언제부터인가 오징어 들어간 김치전이 아주 비싼 요리가 됐다.
내가 어릴 때는 지금보다 김치전을 좀 더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장마철, 혹은 주말 오후 3-4시쯤.
저녁을 먹기도 애매하고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기도 애매한 시간대쯤에
종종 앞집 혹은 옆집 아주머니들이 김치전이나 부추전을 서너 장 부쳐서 갖다 주시고는 했다.
주로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전을 받아 나에게 넘기면 나는 냉큼 들고 가서 아빠와 동생과 먹었다.
주말 오후 무한하게 늘어져 있던 아빠와 나와 동생에게는 단비 같은 간식이었고, 엄마는 현관문에 서서 아주머니와 수다를 떠는 게 꿀맛 같아 보였다.
이웃들이 갖다 주는 김치전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맛있었다. 아마 넉넉히 구운 것들 중 방금 막 부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들을 골라 담아 왔으니 그랬겠지.
우리 엄마도 습습한 날씨면 김치전을 부치시고는 했는데 한번 부치면 열 장도 넘게 부치셨다.(최고 기록은 25장) 내가 김치전이 된 건가 싶을 정도로 집안은 기름 냄새가 그득했다.
뭘 그렇게 많이 부치냐고 이제 그만 부치라고 엄마를 타박한 적도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옆집, 앞집 세 장씩 갖다주고 우리 가족이 인당 한 장씩만 먹는다 해도 열 장은 족히 필요했다.(그리고 우리 가족은 인당 두 장은 먹었다.)
완성된 김치전은 나와 동생이 꿀벌맹키로 갖다 날랐다. 이웃 아주머니들은 "아유 맛있겠네~"하면서 귤이나 과자를 주기도 하시고 들어와서 놀다 가라고 하셔서 그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 온 적도 있었다.
응답하라 1988에 나왔던 광경이 결코 허구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 어느 날 문득 김치전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김치전을 도전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맛있는 김치를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반죽 농도도 맞추기 어려웠다.
어찌어찌 퀘스트 1,2를 깨고 최종적으로 굽기에 들어가면
가장자리를 바삭하고 맛있게 굽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지금은 김치전을 제법 먹음직스럽게 부쳐낸다.
그런데 김치전의 최종관문이 남았으니 그건 바로 '귀차니즘'이었다.
한번 부치면 가족들 모두가 잘 먹는 걸 알지만 한번 마음먹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김치 꺼내서 썰고, 오징어 썰고, 반죽하고 일일이 굽기...ㄷㄷ)
그 시절 우리 엄마들은 어떻게 그 귀차니즘을 극복하고 그렇게 그득그득 부치셨을까?
어쩌면 엄마들에게는 애초에 '귀찮음'따윈 없고 함께 나눠 먹을 '즐거움'만 있으셨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