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라디오
과거에 비해서 오디오북이 많이 대중화되었다. 오디오북을 별도로 구매해야 했던 예전과는 달리 <윌라>, <밀리의 서재>와 같은 스마트기기 애플리케이션의 구독 서비스를 통해서 쉽게 간편하게 이용할 수도 있고, 오디오북의 퀄리티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이 때문인지 오디오북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고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전 대표님께서는 약 1시간가량의 아침 운동 시간을 활용해서 책 한 권씩을 듣는다고 하였고 그의 '독서(讀書) 량', 아니 '청서(聽書) 량'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서 한 시간을 쉬지 않고 뛸 수 있는 체력이 더 대단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에겐 오디오북이 낯설다. 녹음의 품질과 화자의 현실적인 연기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지만 오디오북을 입력하는 나 자신은 아직 제자리인 것 같다. 잠시 딴생각을 저 멀리 지나가버리는 문장들을 쫓아가는 것도 그리고 좋은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밑줄 꾹꾹 눌러 담을 수 없는 것도 오디오북을 듣는 데에는 어색함이 가득하다. 이야기는 따라갈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독서'를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늘 든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다른 오디오 형태의 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2017년 나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책을 읽어주는 코너를 접했다. 단순하게 책의 모든 문장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소개하되 중요한 장면들을 골라서 두 남녀 진행자가 읽어주는 형식이었다. 모든 문장이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작품의 원작을 다시 찾아 읽는 즐거움이 있었고, 작품과 각 장면들에 대한 진행자들의 생각을 엿들을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붕 떠있던 시기에 내 마음을 채워주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늘 그리운 코너, MBC FM4U 굿모닝 FM의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이야기이다.
<굿모닝 FM>은 2003년부터 매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방송되는 MBC 라디오의 오래된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지금은 장성규 아나운서가 진행하고 있지만 김성주 아나운서가 처음 시작한 이후 오상진 아나운서, 전현무 아나운서, 방송인 노홍철 등 다양한 DJ가 거쳐간 프로그램이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듣게 된 것은 방송인 노홍철 씨가 진행한 2017년이었으며 프로그램의 한 코너였던 <세계문학전집>의 팟캐스트를 접하면서부터였다.
<세계문학전집>은 전현무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2015년에 시작한 코너로 MBC 전 아나운서인 김소영 아나운서와 함께 시작한 코너였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 코너에서는 매주 책을 읽어주며 소개했고 책의 분량이 많을 경우에는 2~3주에 걸쳐서 진행되기도 했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제목은 들어본 오래된 문학 작품을 두 진행자가 쉽고 흥미진진하게 풀어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받은 코너였으며 특히 두 진행자의 연기력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 듣는 재미가 있었다.
전현무 DJ가 하차하고 노홍철 DJ가 뒤를 이은 이후에 잠시 코너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팬들의 성원에 다시 부활했고 나는 이 시점에 이 코너를 처음 접한 것이다. 이 시기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상실의 시대>, <데미안> 등 코너에 나온 책을 읽고 코너를 통해 소리로 다시 한번 읽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소영 아나운서가 MBC를 퇴사하면서 코너를 이끌어가는 큰 축 중 하나가 없어졌고 머지않아 노홍철 DJ도 라디오에서 하차하면서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코너는 종영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세상이 좋아진 덕분에 지금도 그 코너를 들을 수 있다. MBC 라디오 애플리케이션인 <Mini>를 통해 <세계문학전집> 코너만을 팟캐스트 형태로 들을 수 있다. 한 편 당 약 30분가량의 길이로 가볍게 들을 수 있고, 전현무 DJ가 시작한 때부터 노홍철 DJ까지 그리고 중간중간 스페셜 DJ와 특별한 게스트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책이 읽고 싶지만 무슨 책을 읽을지 모르겠을 때, 눈보다는 귀로 책을 즐기고 싶을 때, 혹은 잠이 오지 않을 때에도 나는 어김없이 이 코너를 다시 듣는다.
라디오를 좋아합니다.
<세계문학전집>은 나에게 책의 의미를 새롭게 가져다준 경험이었다. 책을 종이의 형태로만 간직하다가 새로운 방식으로 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책이 재밌다는 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말'을 빌려 전할 수 있음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덕분에 좋은 책을 전하고 싶은 열정이 날이 갈수록 커졌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 코너와 책의 전파자가 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책과 관련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나보다 앞서 이 코너를 진행했던 김소영 전 아나운서와 노홍철 씨가 그러한 삶을 먼저 시작하고 있다. 김소영 전 아나운서는 MBC를 퇴사한 후 서점을 창업했고 지금은 그 규모가 커져 세 가지 지점의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노홍철 씨도 해방촌에 작은 책방을 운영하다가 가끔씩 본인의 집에 일반인들을 초대해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나 역시도 좋은 기회로 초대받을 수 있었고 그 순간은 이전 글에서 밝힌 것처럼 꾸준한 글쓰기를 다짐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Intro] 꾸준한 글쓰기를 다짐하며...
라디오는 내 삶을 채워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소중한 기억이다. 라디오뿐만이 아니다. 책과 영화도 지금까지 나의 일상에 다채로운 경험과 감정 그리고 생각을 낳는 고민을 안겨준다. 장르와 전달 방식을 떠나 나를 신선한 공기로 감싸주는 이러한 것들과 함께할 수 있는 매일매일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