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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Mar 08. 2021

24. 꿈꾸는 사람

적응이 되지 않는 의식의 흐름

  꿈. 굳이 덧붙이자면 잠잘 때 꾸는 그 꿈이 맞다. 오늘 내 글에서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라는 꿈의 두 번째 뜻은 거의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캄캄한 밤의 시간에 어슴푸레하게 지나가는 무의식에 관해 얘기해보고 싶어 이렇게 운을 띄운다.


 나는 꿈을 자주 꾼다. 짧게 낮잠을 잘 때도, 피곤해 쓰러지듯 잠에 들 때도, 그냥 평범하게 잠을 잘 때도 꿈을 꾼다. 하나의 꿈을 꾸기도 하고 중간중간 잠에서 깨며 두세 개의 꿈을 꾸기도 한다. 내가 주인공일 때도 있지만, 주인공의 친구 같은 엑스트라 단역이 되거나 심지어는 나무 같은 소품으로 등장할 때도 있다. 신비한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꿈, 살인마들에게 쫓기는 꿈, 연인과 사랑을 하는 꿈, 죽어서 사람들과 이별하는 꿈…. 안 꿔본 레퍼토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지각색의 꿈을 꾸다 보면 도대체 이 내용들이 어디서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꿈은 평소 가지고 있는 욕망의 영향을 받는다던데, 라는 생각은 애써 외면하고 싶다. 그 많은 희한한 내용들이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면 괜스레 숙연해지는 기분이다. 차라리 깨어있을 때 생각이 날 것이지, 글이나 그림으로 써내면 멋진 판타지 작품이라도 한 편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왜 잠들 때 내 눈앞에서만 잠깐 상영하고 마는 건지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꿈들이 있다. 눈을 뜨자마자 흐릿해지는 탓에 정확히는 떠올릴 수 없지만, 차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하면 자신감이 붙는다. 갈래별로 나누면 공포, 연애, 판타지 등으로 다양하지만, 그를 다 꼽으려면 몇 편이고 글을 써야 할 테니 내 마음대로 한 편을 골라보았다. 깨자마자 핸드폰 메모장에 오타를 고칠 새도 없이 써 내려간 꿈 이야기다.


 꿈에서 나는 죽어있었다. 사인(死因)은 모르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나는 목숨을 잃었고, 내가 본 첫 장면은 나의 장례식이었다. 친구들과 온갖 지인들이 모여 있었던 것 같지만 보이는 것은 엄마, 한 사람이었다. 울지도 않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엄마를 한참 바라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나무 아래에 묻혀있었다. 수목장. 내가 묻힌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곁에 엄마가 있었다. 왜인지 나를 보았고, 그제야 한참을 우시는 엄마가 있었다.


 그 뒤로 엄마와 여행을 떠났다. 함께 하지 못했던 일을 가득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허나 죽은 몸을 이끌고 돌아다니는 것이 문제가 되기는 했는지 계속해서 낯선 무리에게 쫓겨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결국 산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더 이상 내가 죽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익숙한 그루터기에 앉아 마지막임이 틀림없는 대화를 나눴다. 다음에는 내가 엄마나 언니를 하겠다느니, 다음번에는 더 오래 같이 있자느니 따위의 자잘한 문장으로 기약 없는 다음을 약속했다. 오래지 않아 나는 사라졌다. 엄마는 산을 내려가 밥을 먹었고, 오랜만에 단 잠에 들었다.


 쓰고 보니 구구절절하다. 깨고 나서 가장 여운이 깊었던 꿈 중 하나여서 그런 것 같다. 또한 이 꿈은 꿈이어서 다행이다, 라고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기도 하다. 꿈이라는 대상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유독 이 꿈은 그랬다. 깨어나는 것이 슬플 만큼 아름다운 꿈이 있듯, 깨어나서야 잊었던 아름다움을 깨우치게 하는 슬픈 꿈이었다.


 허상과도 같은 것. 잡을 세야 잡을 수도 없고, 억지로 그리려 해도 그릴 수 없는 것. 굳이 기억해낼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기억에 묻어났던 꿈의 잔재로, 지극히 개인적인 오늘의 글을 꾸려봤다. 오늘도 별별 꿈을 꾸고 일어난 탓에 주제가 이리 되어버렸지만, 시시콜콜한 이 이야기에 읽는 당신이 재미가 있었다면 즐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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