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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Mar 13. 2021

26. 하고 싶은 일

더 이상 미루고 싶지않아 지는때가 있다.

 참아라. 내가 12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가장 많이 부딪힌 말 중 하나다. 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달래듯, 어떤 사람은 윽박지르듯, 또 다른 사람은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를 타박하듯 저 말을 꺼냈다. 다만 모두가 그 말이 오롯이 나를 위한 조언인 것처럼 굴었다. 호의로 포장한 칼. 앞서 세상을 다 살아봤다는 오만함과 허황되어 보이는 꿈을 가진 이를 위한 걱정이 뒤엉킨 그 말을 나는 그렇게 비꼬곤 했다.


 학생이라는 본분을 지키라는 주위의 조언이 야속하게도, 나는 학교 공부에 그다지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배우는 것은 즐거웠다. 하지만 마음껏 질문을 하고 재미있을 만큼 하나를 탐구하기에는, 대한민국의 정규 교육과정을 밟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매달 시험을 보고 등급과 순서를 매기는 학교의 시스템은 분명 효율적이었지만 내겐 너무나 가혹하게 느껴졌다.


 공부는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건 많고. 이루지도 못할 버킷 리스트를 공책 한 면에 빽빽이 채우며 나는 매번 그 딜레마를 중얼거렸다. 해야만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이 부딪쳐 만들어 낸 고뇌 속에서, 헤어 나올 길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며 밤새 이름만 미련히 적어내려야 했던 그 일들을 잊어갔다. 꿈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도 못할 만큼 가엾은 것들을 차례로 지워갔다. 한 번쯤 불만이 터질 법도 했지만, 그 흔한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나는 조용히 지냈다. 가족의 눈 밖에 나는 게 싫었고,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게 무서웠던 그때의 나는 그게 정답이라 믿었다.


 이후 남들의 인정을 갈구하는 나로부터 도망쳤던 고등학교에서 나는 변화의 시간을 가졌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겼던 알껍질을 깨기 위해서, 추락한 애벌레처럼 열심히 몸부림을 쳤다. 공부에 집중하라는 말들을 피해 잠을 줄여가며 대외 활동에 매달렸다. 백일장에 나가 글을 쓰고, 낯선 촬영 현장에서 무거운 장비를 나르고, 바다에 나가 쓰레기를 줍고…. 다른 사람들이 보면 공부는 안 하고 별일을 다한다는 말을 얹을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내게도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있었다. 학교에, 입시에, 공부에는 아무 관련이 없는 여남은 일들. 양심이라는 말로 내 책임을 쥐어들며 놓아준 그 일들은 시간이 흐르며 미련이라는 파편을 남겼다.


  그 미련 속을 헤엄치다 입시가 끝나지 마자 갑자기 뭍을 만났다. 이제껏 나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나 혼자서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공교롭게도 이제는 나를 제한할 사람도, 보호할 사람도 나밖에 없게 되었다. 마냥 후련하진 않았다. 오히려 혼자 삶을 쌓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일까, 20살을 맞이한 이래로도 나는 그 옛날 꿈들을 다시 뒤적인 적이 없었다.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상경하고 시간이 지나며 썩 살 만 해지고, 슬금슬금 학교 커뮤니티의 동아리 게시판을 기웃거리던 참이었다. 그리고 한 동아리를 보았다. 그리고, 가족은 고사하고 남들에게도 거의 말해본 적 없는 내 가엾은 미련이 요동쳤다. 이제까지의 데인 경험을 수없이 훑어보아도 더 이상 참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홀린 듯 입부 신청서를 쓰고 무경험자로서의 당당함에 힘입어 메일을 보냈다. 불과 그저께의 일이다. (아직 면접도 보지 않았고, 입부 가능 여부도 모르기에 섣불리 동아리에 관련한 서술을 이어가진 못하겠다. 장황하게 설레발을 쳐두면 나중의 내가 곤란해질지도 모르니 이쯤 하겠다.)


 다만 이번이 특별한 이유는, 정말 내가 살면서 항상 바라왔지만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세계로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합격하면 더나 할 위 없이 좋겠지만, 만일 떨어지더라도 이번을 시작으로 이 꿈으로의 망설임 없는 도전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여기까지 쓰면 도대체 그 꿈이 무어냐 울화통이 터질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질질 끌고 있는 내가 답답하다. 하지만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도 입 밖으로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이를 키워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얼굴이 홧홧하고 망설여진다. 부연 설명을 붙이기엔 나는 아직 이 일을 잘 모르고, 당장 시작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으니 그냥 그 이름을 밝히고 황급히 도망가려 한다.


 그 꿈의 이름은 뮤지컬이다.  언젠가 이 일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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