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 Mar 31. 2021

29. 시간

나는 멈춘 듯한데 너는 잘만 흘러가는구나

 최근 뼈저리게 공감하는 말이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다. 그만큼 내 요즘은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그저 온종일 해야 하는 일에 치여 살다 쑤시는 몸을 부여잡고 잠에 들면 다음 날 아침이 밝아있었다. 과제 제출 기간, 실시간 강의 기간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달력을 거의 확인하지 않았고, 결국 날짜를 확인하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는 상황까지 왔다. 제발 빠르게 지나가 달라고 애원하던 때는 멈춘 듯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지금은 내가 옆에서 보챌 수도 없을 정도로 멀리 가버린 기분이다.


 그걸 가장 크게 실감한 순간은 한창 할 일에 매여 살던 공백 기간의 어느 하루였다. 과제 글을 쓰기 위해 여느 때처럼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계속 손이 자판에서 헛도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 손을 펼쳐보니 손톱이 길게 자라 있었다. 잘라도 잘라도 계속 자라나는,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인체의 신비였지만 왜인지 나는 그때 잠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본가에 있을 때는 조금이라도 자라면 불편하다며 모두 잘라버렸을 손톱이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만큼 내게 무심하게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괜스레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무뎌져 있던 감각을 잠시 자각한 순간, 시간이 다가왔다.


 손톱을 잘라내며 별의별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지났지. 뭘 했다고, 난 그 시간 동안 뭘 했더라. 잘 살고 있는 건가.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러다 두서없이 차오르는 생각이 낯설어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수업과 과제, 동아리 관련 스케줄이 가득 차 있던 달력을 괜히 한 번 넘겨보고, 길어 있는 손톱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하루 계획표와 필기도구, 텀블러와 각종 쓰레기가 한 데 널브러져 있는 책상을 찬찬히 둘러봤고, 어제까지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뉘이고 잠들었던 침대를 바라보기도 했다. 모든 게 낯설어 두렵기까지 했던 감각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제는 제법 내 흔적이 묻어나는 공간이 새삼 신기했다. 언제부터 이 힘든 일상을 받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공간이 되어 있었던 건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념과 함께 손톱을 모두 자르자 개운하고 생생한 감각이 돌아왔다. 헛돌지 않고 무던하게 자판을 딛는 감각이 익숙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글을 써 내려가지 않고, 그냥 다시 짧아진 손톱을 쳐다봤다. 손가락을 굽히기도, 펴기도 하며 묘하게 시린 기운이 감도는 손톱 끝을 바라봤다. 하지만 정말 손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손을 봤는지, 그냥 시선을 돌릴 곳이 필요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저 그때는 오랜만에 느낀 시간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맴돌았다.


 나는 모르는 사이 시간은 계속 지난다. 유치원생도 알 만한 원리를 왜 나는 그렇게 자주 잊어버리고 사는지 모르겠다. 또 습관처럼 나중에를 되뇌다 보니 어느새 나는 그 나중에 도착해있는데 그걸 깨닫지도 못한 채 또 정신없이 하루를 살고 만다. 여담이지만, 이번 봄에는 꼭 벚꽃을 보러 가겠다고 신년부터 계획을 잡아놨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던 시린 2월에도 그 생각을 위로 삼곤 했다. 서울에서는 혼자 재밌게 놀러 다니며 즐겁게 살 거라고 나름의 으름장도 놨었다. 그리고 어떻게 됐냐고? 벚꽃은커녕 마지막으로 일이 아닌 이유로 외출한 게 2주가 다 되어간다. 꽃은 만연히 피고 설렘은 한껏 부풀어 말 그대로 낭만의 시기인데 어째 내 사정은 그렇지 못한 건지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가끔 이러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가서야 오늘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다가오곤 한다. 아마 희미하게 남아있는 무의식의 자아가 보내는 구조신호인 것 같다. 이미 나는 자주 지난 일로 후회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때도 그랬듯, 지금 당장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시피 하다. 물론 그 이유는 내게 바뀐 삶과 변화에 대한 책임을 짊어질 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걸 느껴봤자 서럽기만 한 것이 시간이었다. 항상 나는 시간의 흐름을 잊고 침묵하길 선택했고, 앞으로도 내가 다른 선택을 하기까지는 정말 많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할 거다. 다만 예전과는 다르게 나는 오늘 떠오르는 시간의 잔상에 작게 쐐기를 박아놓고 지나가려 한다. 내가 생각해낸 단어로, 문장으로 이전에는 잡아두지 못했던 그 시간의 기억들을 잡아둘 심산이다. 후에 돌아봐봤자 지난 시간이라는 데에는 다를 바 없겠지만 돌아볼 것이 있는 것과 돌아볼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시간을 들여 그 차이를 빚어볼까 한다.


 지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잊힌 날들이 있으리라. 나는 그 시간들이 돌아오길 바라면서, 바라지 않는다. 내게 쏟아질 시간들 사이에서 잊히지 말아 달라며 모든 기억을 잡아두기엔 무리가 있으니. 그래도 잃고 싶지 않은 날에는 작게 모서리를 접어본다. 언젠가 다시 펼쳐볼 수 있는 날이 오도록.

작가의 이전글 28. 공백을 끊어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