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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Apr 06. 2021

32. 도망

나조차도 나를 잡을 수 없는 시간으로

 시험과 조별 회의, 과제에 치여 숨 막히는 일상을 이어가는 요즘이다. 평소라면 정신줄을 잡고 어떻게든 버텼겠으나, 이번 달은 그저 희망이 없다는 말만 중얼거리며 좀비처럼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우스갯소리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선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밤 12시까지 제출인 과제를 11시 50분까지 붙들고 있는 때나, 당장 오늘이 중간고사인데 어떤 시험을 본다는 공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의 심정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짊어질 것들이 너무 많아서 기어코 숨을 짓누르는 느낌.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버거워질 만큼 궁지에 몰린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런 시간을 살면서도 운동을 나갔던 어제의 일이었다. 빠르게 걷지도 않았는데 울렁거리는 머릿속에 '오늘은 무리하지 말자'라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 평소 같으면 스스로에게 허용되지 않을 관용이지만 어제는 좀 달랐다. 생존본능이 보내는 신호같이 느껴져서 조용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걷고 뛰었는데도 숨은 벅차올랐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바라보며 달리는데, 문득 트레이트밀 위에 'Emergency'라는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새빨갛게 칠해진 채 혼자서 입체적으로 올라와있는 버튼. 묵묵히 달리면서도 왠지 서러워지는 기분에 그 버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바탕 심란한 운동을 끝내고, 뒷정리를 한 뒤 저녁을 먹으러 내려가는데 멍하니 생각이 떠올랐다. '내 인생에 비상탈출 버튼이 있었다면 난 그걸 몇 번이나 눌렀을까.'


 누구나 한계라고 느껴질 만큼 힘든 시기가 있었을 거다. 나도 그랬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힘이 남아있지 않고, 나아가고 싶지도 않다고 빌었던 때가 수도 없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그때마다 나는 애써 이 일이 모두 끝났을 때의 아주 먼 미래로 도망치곤 했다. 이번 일이 다 끝나면 본가에 다녀와야지, 시험이 다 끝나면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야지. 물론 실제로 그렇게 부르짖은 내일이 오늘이 되었을 때 그 결심이 현실로 이루어진 정도는 미미했다. 그 도피는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뭐랄까, 도저히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날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직면할 자신이 없는 현재의 나를 위한 마취 같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힘듦과 생각의 도피에 찌들어있던 어제는, 문득 나의 요즘이 달리기와 겹쳐 보였던 것 같다. 달리다가 속도를 높여 숨이 터질 정도로 달리는데 다시 느린 속도로 변속할 수 없는 상황 같았다. 속도를 줄일 수도 없는데 계속 빨라지기만 하는 지면을 딛는 가상의 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럼에도 그리 안쓰럽게 보이지 않았다. 기계 위에서 달리는 나에겐 당장의 걸음을 멈출 정지 버튼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생각이 닿자 현재의 내가 한없이 구차해지면서도 만일, 이라는 맹랑한 생각의 싹이 돋았다.


 만일. 삶의 비상탈출 버튼이,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 정말로 어딘가로 탈출할 수 있는 버튼이 내 손에 쥐어진다면 나는 아마 몇 번이고 버튼을 눌러 멀리 떠났을 것 같다. 평소의 나는 굉장한 겁쟁이지만 궁지에 몰리면 누구라도 행동할 결심을 내는 법이니까. 그리고 한 번 길을 떠난 나는 계속해서 버튼을 눌러 결국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렸을 것이다. 얼마간의 피로가 풀리고 다시 평소의 겁쟁이로 돌아왔을 때, 나는 분명 돌아가야 할 힘듦을 보고 두려워할 테니 말이다. 한 번 외면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다시 시작하는데 필요한, 그것을 멈추는 것보다 몇 배는 큰 용기를 난 가지지 못했다.


 나조차도 나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도망치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럼에도 끝내 도망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 시간이 온다. 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시간이 결국 내 고통을 가져가리라는 걸 알기에, 오늘도 도망치지 못한 제자리에서 먼 미래로의 도피를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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